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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사람은 앞날을 몰라

날들 2023. 7. 11. 02:19

"너 거기 가면 아는 사람들 안 만나나? 원래 부대 사람이라든지." 2박3일 동원 예비군을 가는 내게 아빠가 물었다. "아니이, 우리 부대는 완전 소규모 부대였는데 이번 예비군은 완전 사방에서 다 온단 말야. 몇 명이 올지도 모르고, 원래 부대 근처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래도, 한 명은 있을 수 있잖아?" "아니요~ 절대 그럴 리 없네요~ 그냥 지인 만나는 것도 힘든데 무슨 같은 부대?" 내가 군인일 때 직접 부대 방문도 해 본 사람이 할 질문은 아니었다.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납득을 시켰다. "...이번에 그럼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 만..." "절 대 아니에요 ." 엄마 차례가 남았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에는 칼 같다. 한번 한 얘기를 다시 하는 것도 싫다. 아침잠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기고 그제서야 짐을 싸느라 약간 정신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결국 우산을 빠뜨렸다. 우산에 관해서는 일관성 있게 덜렁댄다. 무언갈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 아닌데 우산만은 예외다. 비 예보가 있어서 편의점에서 가장 싼 우산을 샀다. 그리고는, 바로 전 전 문장에서 무언갈 자주 잃어버리는 편이 아니라고 썼지만, 받은 지 20분 만에 예비군 명찰을 잃어버렸다. 예비군 명찰을 확인해야 다음 장소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고, 내 순번이 다가오고 있었다. 현역 시절 지 멋대로 행동하는 예비군들 정말 꼴불견이었는데, 내가 그러고 있었다. 전 애인은 헤어지기 직전 나에게 성인 ADHD가 아니냐고 했다. 아직까지도 타격이 있다. 점점 내 산만함을 실감하고 있다. 하고 있는 공부는 당연하고, 단순히 즐기기 위해 보는 글이나 영상, 게임도 중간에 끊어가며 잠깐씩 다른 걸 한다. 공상에 가까운 잡념도 많다. 어릴 적부터 늘 '해찰 좀 하지 마라'라는 말을 귀에 달고 살았고, 엄마는 내가 '너무' 집중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며 HR 강사인 작은아버지와 진지하게 상담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당시 작은아버지는 날들이는 정말 똑똑하고 재기넘치는 아이일 뿐이라고, 나중에 정말 잘 될 아이라고 오히려 칭찬을 하셨다고 했다. 나 이젠 나이 꽤 먹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다시 예비군 명찰 이야기로 돌아오면, 다행히 나의 추리력이 꽤 쓸만했다. 일단 명찰이 있다고 둘러댄 후 가방 속에서 다른 물건을 넣으며 함께 섞여들어간 명찰을 찾아냈다. 사회에서 자신이 어디의 누구였든 상관없이 곧잘 얼뜨기가 되어 버리고 마는 이등병 시절이 잠깐 떠올랐다. 안도한 다음엔 사람 구경을 했다. 부모님께 그렇게 말은 했어도 막상 입소하니 혹시 지인이 있는지 은근하게 주변을 살피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있었다. 같은 부대 후임이었다. 서로 눈을 의심했다. 심지어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사이인데, 같은 부대 사람과 같은 날 훈련이 배정되리라고는 둘 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조용히 입소한 것이다. 예비군 내내 밥을 함께 먹었고 꽤 내밀한 얘기도 나눴다. 특히 일과 이후 간이 BX에서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과자 하나, 캔음료 하나 들고 시간을 죽이고 있으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군대란 시간이 멈춰 있는 공간이다.

시설이나 식사,  교관들의 대우가 상당히 좋았던 데다 훈련병 시절을 보냈던 장소에 자대 사람과 함께라는 특수성이 더해지자 훈련의 정체성이 퇴역군인 추억여행에 가까워졌다. 60%의 강우확률을 뚫고 비가 와 주었기에 실외훈련이 모두 실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훈련 내용도 줄어들었다. 붕 뜨는 시간도 많았다. 그럴 때 보려고 열심히 단어장을 만들어갔지만 막상 후임과 이야기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한 교관이 위문공연 영상을 틀었다. 하지만 민간인들은 퀸즈아이라는 비인기 아이돌의 공연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교관이 "퀸즈아이라는 그룹 아시는 분 계신가요? (조용) ...이러니까 여기 온 거겠죠?" 라며 운을 띄웠다. 사람들이 실소했다. 나 역시 그랬다. 빠르게 대체되는 중소 아이돌의 적당한 노래와 적당한 안무, 그 순간에만 열광하는 장병들이 담긴 영상은 한심했다. 그런데 다음 순서로 내가 좋아하는 스텔라장이 나왔고, 곧 나는 퀸즈아이를 비웃은 것을 후회했다. 그들은 단지 열심히 일할 뿐이었는데, 지루함은 나를 참 가볍게 만드는구나. 나중에 검색해보니 퀸즈아이는 송은이 씨가 만든 회사 소속이었다. 그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 피프티피프티는 이를 해냈는데. 그런데 피프티피프티, 지금 복잡한 문제에 휘말려 있었지, 하하...

스텔라장은 이 노래를 불렀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터미널로 걸어가는 길은 정말 뜨거웠다. 먹구름이 거짓말처럼 몽땅 사라져버렸고, 대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우산을 한 손에 들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2307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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