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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지리학> - 로리 파슨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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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지리학> - 로리 파슨스

날들 2025. 1. 14. 19:46
CARBON COLONIALISM: How Rich Countries Export Climate Breakdown (2024)


이 책의 역할은 <매트릭스>의 '빨간 약'과 같다. 소비와 공급이 이루어지는 동력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안주했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곳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우리는 어떻게 가담했는지 알 수 있다. 윤리적으로 민감한 사람이라면 마치 처음으로 검붉은 현실을 직시하던 키아누 리브스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상품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앞에 진열되어 있는지, 소비 진작을 통한 경제성장이라는 미몽迷夢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실 그만한 대가가 존재한다는 것과 누가 그 대가를 치르는지는 이미 얼추 알고 있었다. '삶의 질'이나 '재충전' 같은 단어들이 소비를 부추길까 미심쩍어했고, 해외여행이나 골프처럼 규모가 큰 여가활동에 허영심을 갖거나 각종 트렌드를 추종하는 일을 경계했다. 비용 절감과 매출 증대가 최우선인 세계에서 누군가의 품위나 기분을 챙기기 위해('잉여'를 만들어내려면. 잉여는 무에서 솟아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건강과 어딘가의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하지만 (대량생산된 상품을) 하나도 소비하지 않을 게 아니라면 결국 나는 미필적 고의로 체제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학부 수준에서 경영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얻은 결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별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나는 사회운동을 동경했지만 그 힘은 믿지 못했고, 법정 스님처럼 암자에 틀어박힐 자신도 동기도 없었기에 어느 시점부터는 단지 죄책감으로 좌절하고 무기력할 뿐이었다.

이것은 내가 돈을 투자해야 하는 (도전적인) 선택들을 무의식적으로 회피해 온 이유 중 하나다. (다른 이유는 무의미하다는 느낌.) 내 대부분의 여가는 내 방 콘센트라는 경계 안에서만 이루어졌고, '생산적'이랄 것을 거의 하지 않아서 '발전'도 이루지 못했다. 공부야말로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윤리적인 자기계발이었겠지만, 뜻이 없는데 도구부터 사들이고 싶지 않았는데다 억지로 해보자니 허무감이 앞섰다. 발가락에 동상 증상이 있어도 난방을 잘 하지 않았고, 방이 어두컴컴했지만 스탠드를 사지도 않았다. 나아갈 방향을 잃어버린 스스로가 한심하고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마음 한켠에는 거창한 뭔갈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모호하게 긍정적인 감정이 있었고 그건 일말의 안도감, 비겁한 자부심이었다. 나는 별다른 의문 없이 무감각하게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훗날 회한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마치 나치에 협력했던 철학자처럼, 조선의 앞날에는 일본이 필요하다고 진심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친일 지식인처럼, 김일성이야말로 노동자를 해방할 시대의 영웅이라 생각했던 남한의 공산주의자처럼, '그땐 다들 미쳐있었지...' 라며 씁쓸하게 부끄러운 과거를 일축할 거라고 말이다. 나는 무엇을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해낸 것이 없었기에 도덕적 우월감으로 미약한 자존감을 메꿨다.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유형이다. 본인이 스스로의 이상에 다다르지 못하니 그것을 견디기 어려워 스스로의 이상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내가 이 책에서 얻은 것은 개인을 탓하지 말자는 '환경주의적' 논리다. "기후붕괴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다." 글로벌 시장 체계에 가담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소비자' 개인으로서 '착한 소비'를 다방면으로 알아보고 실행할 순 있겠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이 '착한 소비'가 아닐뿐더러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대세에 지장을 줄 수 없는 개인적 양심과 만족의 영역이다. 소비자 개인이 만들 수 있는 실질적인 변화는 없다. 소비자는 정부와 기업의 이해관계로 인해 투명한 실제 정보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탄소배출의 절대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대량생산 체계를 바꾸지도 못한다.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소비자 '집단'으로서의 활동이다. 적극적으로 정치와 입법에 참여하여 투명한 감독 시스템을 촉구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생산자'로서 활동할 수도 있다. 저자는 소비자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결론에 다다랐음에도 지치지 않고 열악한 상황에 처한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났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정보를 생산했다. 물론 무척 어려운 일이지만, 소비자 개인의 관점과 다르게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은 엄청난 차이이자 희망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 어느 정도 알지만 여력도 관심도 없는 사람, 잘 알더라도 해결책이 없는 사람이 함께 일구는 폭력의 재생산 과정에는 정말이지 '원죄'라는 이름이 붙어 마땅하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특정 개인을 탓할 순 없는 일이다... 남도 탓할 수 없고 나도 탓할 수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던 예수는 "죄가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고도 말했다. 그 말을 하며 예수가 느꼈을 참담과 긍휼을 헤아려본다. 죄 있는 사람이 돌을 던지고 있는 한, 돌을 던져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을 비난하는 일로는 정의를 이룰 수 없다. 자기혐오에 빠져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 쪼그라든 사람이 되지 말자.

그래서 나는 블로그를 시작하며 설명란에 '풍요로운 슬픔'이라고 적었다.



여가를 독서 위주로 단순화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공부할 것이 많다. 

- (학부 수준의) 경제학에서 전제로 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상'은 허구다. 실험실 밖에서 정보는 언제나 비대칭적이고, 경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며, 선호체계는 이성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전제가 틀렸기에 이론도 세상을 온전하게 포섭할 수 없다.

- 핵과 같은 비대칭 전력이 없을 뿐이지, 모든 경제적 경쟁은 군비경쟁과 같다.

- '창조적 파괴'는 성장을 위해,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를 위해 필연적으로 도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때 파괴되는 건 업종과 기업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자연도 마찬가지다. 도태가 성장 때문이 아니라 그저 과거 수단에 대한 배타성으로 인해 발생할 수도 있다. (사람은 무한정 성장하지 않는다. 경쟁 속에서 균형을 맞출 뿐이다. Red Queen's Hypothesis.) 그 중에 운이 좋아서든, 뼈를 깎아냈든 간신히 파괴당하는 것만을 모면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시장의 '하부'와 더 긴밀하게 연결될 것이다.

“ ‘창조적 파괴’ 막는 규제 걷어내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신년사 “통화정책만으로 경제안정 한계” 금리인하엔 가계빚 들어 ‘신중론’ 崔대행 재판관 임명 ‘불가피한 결정’ 이창용(사진) 한국은행 총재가 복합적인 대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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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우리가 구입하는 거의 모든 것은 탄소 배출을 통해 기후붕괴와 현지의 환경저하에 (그리고 보통은 그 두 가지 모두에) 기여한다. (중략, P215) 유리, 가구, 스마트폰, 전기,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 이 모든 것은 어디에서 왔을까? 추측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절대로 알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중략, P266) 런던 북부에 자리 잡은 의류 매장의 양말 진열대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산더미 같은 빚을 갚기 위해 소 떼를 지나 천쪼가리로 가득 찬 작은 굴착기 근처로 다가가는 넝마주이가 서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두사람의 시선이 맞닿는 일은 없다. 직접적인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P17. 오염을 GDP에 대응시킨 환경 쿠즈네츠 곡선은 국가의 경제 개발 과정에 따라 상승하다가 이후 하강하는 양상을 보인다. 탄소 배출과 오염은 모든 국가가 거쳐가는 단계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점점 더 심화되는 기후변화의 위험을 회피하는 능력(결정적으로 돈)을 확보해왔으므로, 나머지 국가들 역시 각자의 곡선을 쉼 없이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이런 능력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부유한 국가들은 이 담론을 수용한다. 왜냐하면 쉽게 납득할 수 있고, 부유한 세계가 [다른 곳들보다] 더 안전하고 더 건강한 이유를 논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만일 한 곳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파괴된 것이라면? 만일 한 곳이 안전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위험해진 것이라면?

P20.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취약성은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부와 자원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함수이다. (중략, P268) 재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재해는 폭풍, 홍수, 또는 가뭄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재해는 이런 위험 요소가 취약성 및 경제적 불평등을 만났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싱가포르의 주민들과 동티모르의 주민들에게 허리케인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기록적인 폭우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바람에 몇 시간가량 집 안에 발이 묶이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동티모르의 경우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자연재해는 경제적 재해, 즉 수 세기에 걸쳐 이뤄지는 불평등한 무역과 오늘날의 상업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의 구체적 결과다.

P21. 원인은 부의 창출에 관련된 환경 비용을 부를 축적하는 것과 동떨어진 타지에서 지불하는 체계에 있다. 그 체계를 이 책에서는 탄소 식민주의라 부른다. 탄소 식민주의는 천연자원을 계속해서 추출하고 수출한 뒤, 해당 자원의 소유자들로부터 동떨어진 곳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유구한 체계[식민주의]의 가장 최근 버전이다.

P23. 글로벌 생산의 세계는 현지 환경을 파괴하면서 탄소집약적 생산을 하고 있지만 규제에서 벗어나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 세계는 전 지구적인 탄소 배출에 맞서 싸우는 우리의 능력을 무력화할 뿐 아니라 더 작은 규모로 발생하는 영향을 글로벌 생산의 공급망이라는 복잡한 물류 속에 감춘다. (중략, P24) 이런 식의 생산은 비용을 낮추고 효율성을 높이지만 모호성을 초래한다. 공급망이 길어질수록 꾸준하게 추적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중개인이 늘어날수록 감독은 더 줄어든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중개인들이 국경을 넘나들 때 물류 검문소는 물론 법적 세계와 정치적 세계도 함께 넘나든다는 것이다. (중략, P25) 글로벌 남반구에 자리 잡은 많은 국가들은 엄격하게 모니터링할 역량이 없다. 모니터링을 수행하는 국가라고 하더라도 부패는 드문 일이 아니다. (중략) 이런 유의 환경적 불평등은 주요한 위반 행위이지만 소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 위반 행위가 명시적으로 기록되지 않을뿐더러, 그마저도 소비자에게는 압축적인 형태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P27. 자본의 도피라는 유령, 즉 과도한 규제를 가하면 브랜드가 해당 국가를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이 모든 의사결정의 이면에 항상 도사리고 있다. 정부는 해외 생산에서 발생하는 돈을 원하고, 브랜드는 개입주의적인 정부의 규제에서 벗어나길 원한다. 따라서 글로벌화된 생산 공정에서 환경 관리는 두더지 잡기 게임이 된다. 즉 환경적 영향은 구조적 변화와 결부되지 못한 채 개별적으로 다뤄지며, 그마저도 그 수준이 특히 심각할 때만 다뤄진다.

P28. '생산하는 국가의 정부는 규제를 시행할 만한 역량이 없고, 공장으로서는 자체적인 규제를 시행할 만한 동기가 없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브랜드가 직접 자기와 연계된 공장을 점검해서 이런 관행을 뿌리 뽑으면 어떨까요?' 그러나 이런 조치는 생각만큼 효과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모두가 세계화라는 발상에 익숙해져버렸기 때문이다. 운송과 통신의 혁신 때문에 공간은 확실히 압축된 듯하다. 다시 말해, '지리는 죽었다'. 휴일을 세계 각지에서 보내는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화상회의로 반구를 가로질러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제 기적이 아니라 수백만에 이르는 노동자의 일상적인 업무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장기간 지속되어온 공간적 거리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상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우리는 공간적 거리의 법칙이 끝났다는 사실을 [아예] 내면화하게 되었다. (중략, P29)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공간적 거리를 가로지를 수 있는 최대 속력과 보통의 이동 능력 사이의 격차가 상당히 벌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에서 8시간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고립된 공장에서 런던에 위치한 브랜드의 본사로 이동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방향으로든 한 번이라도 실제로 여행을 해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공간적 거리라는 개념적 영역과 관련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비실용적이고, 적잖은 비용이 들며, 결정적으로 정보 교환이라는 측면에서 가치가 거의 없는 여정이 경제적 물류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지 여부다.

P32. 글로벌 공급망, 특히 경쟁이 치열해 비용이 최우선 순위인 공급망에서는 계약을 체결하는 일과 체결된 계약을 확인하는 일 사이의 괴리가 너무 큰 나머지 점검이 거의 생략되곤 한다. 물리적 거리 그리고 현실 물류의 지리학은 여전히 중요해서, 알려지는 대상, 그 대상이 알려지는 수준, 제기되는 질문의 종류를 결정한다. 그로 인해 관찰된 현실과 추정된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다. 물리적 거리가 더 멀수록,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이 더 험난할수록, 공급망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지속가능성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 사이의 실제적인 접촉은 더 약해진다.

P33. 무지는 수익성이 지극히 높다. 환경을 파괴하는 경제 과정을 깨끗한 것으로, 혹은 최소한 더 깨끗해지고 있다고 가장하는 능력은 환경붕괴를 무시하는 것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세계에서 점점 더 높은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자원이다. 글로벌 생산이라는 어두운 양탄자 아래에 불편한 것, 구미에 맞지 않는 것, 더러운 것, 위험한 것을 쓸어 넣어 감출 수 있는 능력은 식민주의의 한결같은 특징이었다. 불평등하게 저하된 현재의 세계는 단순히 식민지 체계가 남긴 유산이 아니라 여러 방식으로 그 체계를 물려받은 상속자이다.

P36. 기업의 입장 내지는 사실상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필요한 것은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오직 지속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P37.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둘 중 하나다. 환경파괴에 기여하길 멈추거나 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자원을 축적하거나. 지금까지의 증거에 따르면,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다. 그리고 자원 추출 증가와 전 지구적인 탄소 배출의 가속화는 우리가 계속해서 두 번째 경로를 선택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런 맥락에서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은 점점 더 희소하고 불평등한 자원이 되어가고 있다. 많은 부유한 국가의 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되는 반면, 나머지 국가의 환경은 정반대의 궤도를 그리면서 저하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글로벌 경제와 무관한] 별개의 과정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방식을 떠받치는 가장 더럽고 가장 파괴적이지만 여전히 필수적인 산업적 과정을, 그 글로벌한 영향의 타격을 더 오래 견뎌야만 하는 국가들로 수출해온 글로벌 경제의 결과다.

P49. 일반적으로 자원 추출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은 남성이고, 가족과 지역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위가 유사하다. 다시 말해 글로벌 경제를 계속해서 뒷받침하는 가장 지속가능하지 않은 과정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그전에 먼저 추출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사회로부터 추출해내야만 한다. (중략) 매우 저렴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착취하기 매우 쉬운 노동력, 즉 사실상 일회용 노동력이 없으면 이와 같은 노동은 수행될 수 없다. (중략, P51) 대부분의 경우 자연환경은 글로벌 원자재 수요에 보조를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재생되기 어렵다. 더 먼 곳까지 길을 내고, 더 깊이 땅을 파며, 더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으로 그물을 던져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의 근원에는 경제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규모의 경제라는 발상, 즉 더 많이 만들수록 제품이 저렴해진다는 발상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추출에 관한 한 종종 정반대의 진실이 드러난다. 광물을 추출하기 위해 땅을 더 깊이 파든, 아마존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진입로를 더 멀리 내든, 희소성의 증가는 비용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윤을 흑자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착취된 노동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P51. 전 지구적 규모에서 볼 때 추출은 수익성이 낮다. 바로 이것이 과거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가 독립 이후 그 식민국을 따라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다. (중략) 원자재를 수출하는 국가는 원자재를 가공 제조 재판매하는 국가보다 더 낮은 경제적 가치를 획득한다. 따라서 글로벌 북반구에서 글로벌 남반구로 수출하는 재화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1와트의 에너지, 1헥타르의 토지, 1시간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 위해 글로벌 남반구는 더 많은 단위의 에너지를 생산해야 하고, 더 많은 토지를 사용해야 하며, 더 많은 시간 동안 노동해야 한다. 그 평균 비율은 토지 5대 1, 에너지 3대 1, 노동 13대 1로 집계된다.
 
P71. 사람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노동을 산업 노동보다 훨씬 더 선호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산업 노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통적인 노동을 쓸모없는 노동,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노동, 불법적인 노동으로 바꿔버리는 것뿐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도주를 범죄로 다스리는 주법을 동원해 도주한 노동자 대다수를 노동법을 위반한 범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한 방법은 농촌 지역의 공유지를 폐쇄하는 인클로저와 생산성이 있는 토지에 대한 소유권 강화 및 확대를 통해 전통적인 농촌 생활방식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결국 새롭게 생겨난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와 그곳의 인구 대부분이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경제에 편입되었다. 이것이 역사다. 만일 캄보디아 마을 주민 한 명과 마주 앉아 잉글랜드의 인클로저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그 마을 주민은 이내 그것이 매우 익숙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P72) 다시 말해, 산업 노동자는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산업 노동력을 확보하고 유지하려면 최소한 초창기에는 전통적인 생계 수단을 압박해야 한다.

P73. 기후변화는 산업화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출몰하는 동시에 글로벌 공장을 확장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홍수가 날 때마다, 가뭄이 들 때마다, 예측할 수 없는 강우가 찾아올 때마다 농촌 가구를 지원해야 하는 도시 노동자가 받는 압박은 훨씬 더 가중된다. 생계 수단의 질은 떨어질 것이고, 노동시간은 더욱 길어질 것이며, 고용주의 착취에 대한 취약성은 증가할 것이다. 

P76. 파내거나, 베어내거나,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재료가 없으면 성장의 수레바퀴는 완전히 멈출 것이다. 모든 글로벌 인프라와 모든 사회는 글로벌 동력기관에 공급할 연료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중심으로 구조화된다. 생활과 생계에 스며든 추출의 논리는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일단 화학비료로 인해 똥이 쓸모없어지고 나면 화학비료는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라 유일한 선택이 된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 또는 막대한 빚더미 위에 올라앉은 농민들은 야음을 틈타 보호림에서 나무를 벤다. 그 밖의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트롤 어선이 호수 바닥을 모조리 쓸고 지나가면 전기봉을 이용한 고기잡이는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한마디로 말해 지속가능성은 부서지기 쉽다. 그리고 글로벌화된 세계의 추출 논리를 배척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지역을 기반으로 삼는다.

P99. 소비자와 관련해 내가 제기하는 문제는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 1)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와 2) 그 행동이 효과적인지 여부를 알 수 있는 힘과 관련된다. (중략, P103) 글로벌 생산체계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이 오늘날 산업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물론, 그 체계를 더욱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재화를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재화의 경로는 그것을 기록한 일지를 통해서만 추적할 수 있고, 그 모습은 오직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만 표출된다. 일지에 기록되는 재화의 특성은 한편으로는 기업이 설정한 우선순위의 결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거버넌스 체계의 결과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다. 표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공급망이 눈에 띄지 않게 되자 공급망의 진정한 책임 주체를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중략, P134) 글로벌 공급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은 많은 배출원이 감춰져 있거나 상당히 과소평가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P109. 공급망의 일관성은 그것을 규제하는 법적 조치에 의해 달성되는 대신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기준에 의해 달성된다. 그러나 2010~2016년 갭Gap의 공급망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기업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책임과 관련된 자체 제도를 도입하는 것과 사회적 책임의 기준이 실제로 개선되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없음이 입증되었다. 기업이 협약 위반에 따른 불이익을 받으면 상관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미미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협약을 위반한 공장이 장차 진행될 평가에서 탈락할 가능성은 22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이것은 지속가능한 생산이라는 진정한 함정을 고려하기 이전의 이야기이다. 공장들이 높은 노동 기준과 환경기준을 준수한다 하더라도, 그리고 실제로 준수한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하더라도 구매자가 최종적으로 구매하는 재화가 해당 공장에서 만들어졌다고 보증할 수 없다. 최근 진행된 의류 부문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발주한 모든 주문의 약 36퍼센트는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하도급되었다. 특히 캄보디아는 이 수치가 훨씬 더 높아서 발주한 모든 주문의 거의 55퍼센트가 [불법으로] 하도급되었다. 소형 공장 수백 개로 이뤄진 막대한 그림자산업은 규제를 거의 완벽하게 벗어나 있다. (중략, P111) 이것은 오늘날 글로벌 생산을 구조화하는 방식, 즉 대량 구매자가 물류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생산자에게 준수를 강요하는 방식의 징후이다. 수주한 주문을 납품하지 못하면 주문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투자한 자본을 회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발주한 브랜드와의 관계도 틀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생산자의 입장에서 실패는 선택지가 아니다.

P114. 친환경 이미지는 수익성이 매우 높다. 소비자들이 진심으로 친환경 제품을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벌 기업은 그들이 내세우는 주장의 진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친환경 이미지에 대한 홍보에 집중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녹색 자본주의라는 환상이다. 기껏해야 그린워싱이고 최악의 경우 노골적인 거짓말이다. (중략) 소비자들은 친환경 제품을 구입하려 하기보단 그런 제품에 대한 감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즉 독립적인 제3의 기관을 통해 공급망이 보이는 그대로 투명하게 유지되도록 보장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중략, P115) 앞으로 어떤 브랜드의 티셔츠, 커피, 휘발유가 가장 친환경적인지 알아볼 일이 생긴다면,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집으로 돌아가 국회의원에게 엄격한 공급망법을 제정하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길 바란다. 편지 그 자체가 변화를 촉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소비자라면 지역 정치에도 참여하길 바란다.

P116. 변화를 위한 운동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이 지속가능한 소비라는 아편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의 기를 죽이거나 그들에게서 권한을 빼앗으라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에너지가 정치와 입법으로 향하도록 이끌 수 있길 바란다. 매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윤리적 구매라는 도덕적 압력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기후변화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울이는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 뿐이다. 그 대신 각자가 내리는 친환경적 결정, 즉 생태를 의식해 선택한 각자의 결정을 면밀한 조사, 정의 실현, 변화에 대한 요구로 승화시켜야 한다. 한 명의 개인으로서는 취약하지만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우리의 경제, 우리의 생산, 우리의 기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음으로써 여러 형태의 남용을 종식시키자고 요구할 수 있다.

P123. 지속가능하게 생활하기 위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주요 변화 중 권장되는 한 가지 행동은 비행 횟수를 줄이는 일이다. (중략, P124) 전 지구적 탄소 배출이라는 큰 맥락으로 볼 때 항공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1.7%로, 가축과 분뇨(5.8%), 농업/임업 토지 이용(18.4%), 산업 에너지 사용(24.2%)에 비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훨씬 더 나쁜 소식은 이 수치가 심지어 2000년부터 2020년까지 매년 평균 2.2%를 기록한 전 지구적 탄소 배출량 증가율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기후변화를 멈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고 이듬해 1월 1일부터 당장 비행을 기약 없이 중단하겠다고 서약하더라도, 그 밖의 다른 모든 조건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듬해 첫날의 대기 중에는 여전히 많은 탄소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P126. 주요 국가들의 탄소 배출량은 감소하거나 안정세에 접어드는 반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탄소 배출량의 끊임없는 증가세는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불일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는 점점 더 글로벌화되고 상호연결되어가는 데 비해, 감축량은 개별 국가 단위 및 국경 안으로 확고하게 국한되는 탄소회계 체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더 부유한 국가들이 글로벌 산업에서 자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축소하는 가운데, [경제적] 이익은 더 적고 환경에는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 공정을 글로벌 남반구로 '외주화'하면서 이런 공정에 관련된 배출량, 즉 최소한 언론의 표제를 장식하는 수치가 함께 이전되는 것이다. 오늘날 수입된 배출량, 즉 재화를 사용하는 국가가 아닌 국가에서 발생하는 배출량을 모두 합치면 전 지구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P136. 건조 환경built environment은 에너지와 관련된 전 지구적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3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블랙 카본의 약 20퍼센트는 벽돌 가마에서 배출된다고 할 수 있다. 전체의 90퍼센트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벽돌 가마는 위험한 오염원으로 현지인의 건강과 자연 환경에 매우 큰 피해를 입힐 뿐 아니라, 대부분의 온실가스 보고서에 누락되어 있찌만 지구 온난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간주된다. (중략, P137) 그러나 현대판 노예제를 비롯해 인권과 관련되어 있고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핵심 문제들의 원천으로 인식되는 해외 산업과의 거래에 내재된 환경적 사회적 함의는 국가 정책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이 감춰진 무역은 탄소 배출 측면에서 볼 때도 중대한 문제다. 벽돌이 남아시아에서 서유럽까지 1만 7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여정을 이동하면서 어마어마한 규모의 탄소를 배출하기 떄문이다. 벽돌을 실은 40피트 길이의 컨테이너 한 채는 남아시아에서 영국으로 이동하는 여정에서 620톤의 탄소를 배출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P142. 모니터링 체계들은 탄소 배출이라는 전 지구적 문제를 개별 민족국가 중심의 문제로 제시함으로써, 환경보호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관리되는 환경을 보호하고 역사적 불평등을 고착화한다. (중략, P143) 북반구가 누리는 경제적 이득은 남반구의 환경적 손실을 토대로 구축된다. 부유한 세계의 환경안보에 필요한 자금은 글로벌 남반구의 노동자들을 날로 심해지는 기후위험에 내몲으로써 발생한 기업의 이윤으로 충당된다.

P144. 탄소 식민주의는 하나의 요점으로 수렴한다. 식민지는 한 곳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곳의 환경 착취를 정당화하는 프레임이라는 것 말이다. 현실에서 이것은 은폐로 나타난다. 은폐는 화석연료와 산업적 과정이 유발한 환경적 영향을 하나의 회계 장부에서 또 하나의 회계 장부로 이전하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도 있고, 그 환경적 영향을 환경적 회계 내부의 균열을 통해 빠져나가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은폐는 정당화와 관련이 있다. 탄소 식민주의는 단순히 물류적 가림막이 아니라 식민적 권리를 예상하고 조작하는 시장 기반 환경 논리라는 '도덕적 가림막'으로 추출 과정을 은폐하는 체계를 의미한다.

P144. 기술적 특 안의 환경 규제는 환경적 의무를 지거나 환경에 대해 우려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수준을 설정한다. 예를 들어, '자정 능력' 한계를 엄격한 윤리적 지표로 규정하고 나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플라스틱 오염은 사실상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지어 물고기의 아가미에서 플라스틱이 발견되더라도 말이다. 글로벌 경제에서 배출되는 탄소량을 결정하는 것도 이와 동일한 논리다. 간단히 말해, 국내에서 발생한 탄소는 문제가 되고 국내에서 발생하지 않는 탄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략, P145) 민족주의라는 뿌리 깊은 논리는 소비 기반의 측정이 실행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P146. 조사관의 관할권을 기나긴 국제 공급망 전체로 확장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론상으로는 국가별 점검의 총합과 국제 공급망을 점검한 수치가 동일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공급망을 모니터링하는 각국의 역량 차이 때문에 국가별 점검의 총합이 국제 공급망 각 부분을 대상으로 한 점검의 합보다 더 작다. 이런 현실을 기업도 알고, 정부도 알지만 국제적인 공급망의 모호성은 용인 가능한 지식의 공백으로 간주된다.

P149. 첫째, 국내 생산을 바탕으로 하는 탄소 배출 목표를 포기하고, 그 대신 쉽게 활용할 수 있지만 부유한 국가의 정치적 편의를 위해 주변화되곤 하는 소비기반 조치를 채택해야만 한다. 둘째, 일부 부유한 국가들이 배출하는 탄소의 절반이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감안할 때, 국내 생산에 적용되는 환경 및 탄소 배출 규제를 글로벌 공급망에도 반드시 엄격하게 적용해야만 한다. 이 새로운 관점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마지막 우선순위, 즉 글로벌 공장이 재해의 지형을 형성하는 방식을 인식하는 층위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글로벌화된 경제는 물자와 부를 부유한 세계로 빨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원래 있던 자리에 폐기물을 남기도록 설계된 체계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P174. 기후변화의 영향을 논할 때, 그 영향의 결과를 반드시 통계적 지표를 기준으로 하향 추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결과를 기후변화와 객관적으로 연결지을 수 없다. 바꿔 말하자면, 기후변화와 확정적으로 연계될 수밖에 없는 단일한 사건, 단일한 고난 혹은 단일한 재앙은 없다. 석면이나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이 암 발병률을 높이듯, 어떤 개별적인 사건이 다음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높였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결과, 기후 자체의 실체 없는 객관성과 기후가 유발한 고통의 물리적이고, 실체적이고, 가시화된 주관성이 분리된다. 이런 분리는 기후변화가 일상생활 및 노동의 경제학과 뒤섞이게 되는 미묘하고 복잡한 방식이 통계에 누락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다라와 보파로 하여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예이 맘에게 고향을 떠나 낯선 더시에서 걸인이 되는 것 이외의 모든 선택지를 앗아가버린 농촌의 변화는 기후변화로 인해 느닷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가 촉매로 작용해 심화된 것이다. (중략) 기후변화는 점점 더 커지는 압박 요인, 협상력 감소, 노동조건 악화로 경험된다. (중략, P181) 이와 같은 사건은 기존의 인간 체계를 짓밟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의 내부와 주변에서 작용한다. 따라서 재해의 인간적인 차원과 자연적인 차원을 분리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중략) 그것은 저임금, 규제 결여, 부족한 선택지 등 모든 측면에서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경제 체계의 산물이다.

P189. 도시의 부를 드러내는 참신한 새 얼굴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자재는 뜬금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소유였던,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곳이었던 어딘가에서 파내고, 채굴하며, 잘라내고, 추출하거나 준설해내야 한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자연을 돌보는 문제일 뿐 아니라 더욱 깊은 수준에섬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가치가 있는지를 규정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보호가 필요한 것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은 심히 불평등하다. 지난 30년 동안 다른 많은 가난한 국가들이 전폭적으로 승인했던 것처럼, 캄보디아 같은 국가가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승인하게 되면 자연 자산을 세계시장에 내놓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가치에 대한 통제권까지 넘겨주어야 한다.

P191. 부탄은 지구상에서 탄소발자국이 마이너스인 유일한 국가다. 325만 헥타르에 달하는 '활용도가 낮은' 부탄의 숲은 매년 600만 톤의 탄소 (부탄의 총배출량의 4배)를 흡수해 지구의 공기를 적극적으로 정화함으로써 부탄 국민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기여한다. 부탄의 숲이 달성한 대단한 성취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은행의 시선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대들보를 상징한다. 즉 누군가의 소유이거나, 가치가 매겨졌거나, 비용이 지불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용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

P193. 공유지의 비극에서 제시하는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공동으로 소유하는 이 거대한 자원은 위험에 처해 있을 뿐 아니라 시장의 개입 없이는 필연적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시장을 자연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수단이자 혹독한 인간 활동으로부터 자연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부각하면서, 오늘날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해 많은 함의를 드러낸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사적 소유는 책임감, 가치, 보호를 의미하며 소유권의 부재는 부패, 오용, 파괴를 의미한다. 문제는 수 세기에 걸쳐 쌓여온 증거가 정반대의 결론을 가리킨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던 공동소유의 역사는 악의적이고 무분별한 파괴에 대한 것과 사뭇 다른 이야기, 즉 수 세기, 심지어 수천 년에 걸친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중략, P194) 하딘은 환경 보존에 성공한 사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품루몬의 사례에서처럼 단지 금전적인 이유 때문만이 아닐 수 있음을 간과했다. 환경은 깊은 문화적 의미는 물론 종종 영적인 의미까지 지니며, 그런 점에서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P196. 최근의 인류학자들은 애니미즘적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 서구권이야말로 문화적 규범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 즉 사실상의 예외일지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전 세계 대다수의 인구에게는 자연을 그저 무생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자연환경의 특성을 찾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환경에서도 인간적 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널리 퍼져 있지만, 전통적으로 자연환경을 인간의 사유 재산으로 분류해온 서구권이 형성한 환경 거버넌스와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초국적 법학자 수자나 보라스의 말마따나 "서구권의 권리 개념이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우위 관계로 파악하고 자연의 소유를 함의하는 재산권을 중심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인간과 자연을 구분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의 실체에 나머지 실체보다 높은 지위를 부여하면 낮은 지위의 실체는 필연적으로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고방식은 공유지의 비극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시장 논리에 기반을 둔) 환경주의와 완전히 반대되는 관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생각만큼 공상적이거나 급진적이지 않다.

P198. 최근 몇 년 동안 환경에 대한 인간의 권리뿐 아니라 환경 자체의 권리도 법으로 인정하는 다양한 사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 째 사례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주에서 등장했다. 바로 1972년 어느 기업이 놀이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오래된 숲을 매입하면서 시작된, 이른바 시에라 클럽 대 모튼 소송이었다. 이 소송에서 판사는 선박에서 기업에 이르는 수많은 비인간 실체가 법적 목적상 인격권을 가지고 있고, 자연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시했다. (중략) 이와 같은 법적 틀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패러다임의 이행이 아니라, 정답을 찾을 수 없다면 질문 자체가 문제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을 일러준다. 글로벌화 세계에서 우리가 환경에 대해 던지는 질문은 현지와 관련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된 것도 아니다.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들은 현지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고안되고, 경제적 여건은 환경 관련 대화에 참여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곤 한다. 환경을 대변할 수 있으려면 먼저 발언권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결정되어야 한다.

P204. 지식에 대한 통제는 자원에 대한 통제를 수반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환경 통계 자료에도 권력과 자본이 얽혀 있다. 거의 모든 국가의 경제는 이제 너무 글로벌화되고 상호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국가도 단독으로는 그것을 감독할 수 없다. 메콩강 사례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역의 흐름에 대한 지식은 서로 다른 당사국들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공개할 것과 공개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면서 통제한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약속을 홍보하는 해외 구매자에게 크게 의존하는 캄보디아나 베트남, 심지어 중국 같은 국가들이 환경 규제를 유의미하게 '강화'하도록 유도할 만한 요인은 제한적이다. 구매자들의 입장 역시 유사해서, 그 국가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을 매우 흡족히 여긴다.

P216. 권력은 군대라기보다는 기차 선로처럼 보인다. 권력은 우리가 타는 방법을 아는 유일한 탈것이고, 정해진 경로를 습관처럼 운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선로 너머의 광활한 대지와 그 너머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견해, 모든 사실은 그 너머의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 모든 견해, 모든 사실은 기차에 오르는 승객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승객들은 자신들이 진보하고 있다고 느낀다.

P217.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자원 추출에 동반되는 침묵은 결코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원, 자신의 숲, 자신의 언덕을 대변할 수 없게 만드는 막대한 불평등의 결과다.

P217. 지속가능성 사고는 기후의 영향과 관련해 현지와 현지의 지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장소에 기반한 과학'을 점점 더 크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환경적 사고를 탈식민지화할 수 있는 방법, 추출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어쩌면 1700년대에 시작되어 서서히 진행되어온 자연의 죽음을 막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글로벌 경제를 녹색화하는 일과 관련된 많은 과제 중 가장 다루기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권력이라는 저울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되돌려줄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중략) 주변화된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규제하는 법을 제정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야 하고, 그런 실천을 통해 사람과 기업 간 권력 동학의 균형을 재조정해야 한다. 이 과정은 느리고 지난하지만, 이미 진행되고 있다. 대서특필되는 최신의 친환경 기술처럼 화려하지는 않을지라도 각국에서 출현하기 시작한 새로운 환경법은 환경 수호자들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 중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P226. 기후변화에 대한 견해차는 오히려 대부분 근본적인 질문, 즉 지구의 생태계와 그에 의존해 생계를 건사하는 민중에게 영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으면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규모를 계속 키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중략, P227) '녹색 성장' 패러다임을 주창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과 자원 사용의 동조 관계를 해체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초기의 명백한 성공은 날개가 되어 탈동조화 개념을 확산시켰다. 경제성장이 자원 사용과 점점 더 많이 그리고 영구적으로 '탈동조화'되어 GDP를 지속가능하면서도 무한하게 확장할 수 있다는 발상의 영향력은 매우 막강해서,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모두 고위급 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이런 발상이 대부분 부유하고 더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공유된 믿음의 기저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러나 히켈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의 체계가 견딜 수 있는 자원 추출의 대략적인 한계는 매년 약 500억 톤인 데 반해 세계는 2020년 무렵에 이미 매년 700억 톤을 소비하고 있었고, 현재의 경제성장률로 미뤄볼 때 2050년에는 자원 추출의 규모가 1800억 톤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녹색성장은 단순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P229. 히켈은 '탈성장'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인간 개발에 대한 재분배적 접근법을 위해 자원 사용과 경제적 GDP의 규모를 축소하자는 탈성장은 여전히 비교적 참신한 발상으로 남아 있고, 아직 주류 정책적 사고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탈성장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정신, 즉 소비를 축소해야만 지속가능성을 유의미하게 달성할 수 있다는 발상은 대중의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다.

P235. 브렉시트를 초래하고 트럼프에게 이목을 집중시켰던 투표가 이뤄졌던 2016년 이후, 과학적 결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학 자체에 대한 회의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유행하는 정치 풍토가 자리잡았다. 영국의 브렉시트 찬반 투표를 앞두고 "전문가는 충분하다"고 외친 영국인들부터 "지구 온난화는 미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중국이 자족적으로 지어낸 개념"이라고 강변한 트럼프까지, 모두 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런 눈속임이 그토록 효과적인 이유는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갈망해온 이상, 즉 다수의 발상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P238. 중앙정부가 예산을 배정하는 한, 의사결정권 역시 정부가 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은 기술적 과학적 의사결정권을 빼앗기곤 한다. (중략, P240) 과학적 진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뜬금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진실은 정치적 이해관계, 불균등한 경제력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동일한 세계에서 도출된다. (중략, P242) 우리는 지식이 유용하고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수집한다. (중략)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파헤쳐보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절대로 순수하게 과학적이지 않다. (중략) 이 사실은 우리가 환경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 곧 돈이 던지는 질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p243. 금융, 경제, 계획의 언어는 구술된 경험을 용납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평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p244) 과학적 방법의 초석이 된 NULLIUS IN VERBA는 거칠게 번역하면 '아무도 믿지 말라'는 뜻이다. 즉 합리적 사고의 기초는 모호한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객관적인 증거로 이뤄져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순수한 이성의 영역에도 한계가 있다. 실험실의 증류된 명료함을 벗어나는 순간 가장 순수한 형태의 과학적 사고는 증발해버리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다른 과학적 결론을 대중적이고 정책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번역하기 위해서는 설득력 있고 권위 있는 논거를 제시함으로써 추가적인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도 청중을 납득시켜야 한다. (중략, P245) 페미니스트와 글로벌 남반구 학자들은 주관적이면서도 권력관계를 고려하는 접근법을 바탕으로 식민 지배의 엄연한 사실들을 무수히 드러냈다. 그들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객관성에 도전하면서, 사회과학자 역시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조사하고자 하는 사회현상으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는 핵심 전제를 기반으로 하는 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진실'을 추구할지라도, 우리가 던지는 질문과 우리가 보는 것을 해석하는 방식은 필연적으로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이 결부되지 않은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P246) 수치는 유용하다. 그러나 문제는 기후변화에 가장 취약한 많은 이들에게는 개인이 경험한 이야기가 전부라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은 많은 경우 교육을 받지 못했고, 거의 예외 없이 고위급 기후 정책의 영역에서 증거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만한 종류의 대규모 통계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기후의 미래를 둘러싼 논쟁에서 사실상 배제된다.

P252. 기후변화에 관한 담론을 들을 때, 그것이 정책이나 논거이든 혹은 환경을 이해하기 위해 제시된 새로운 프레임이든 그 말을 뒷받침하고 있는 이해관계를 살펴보자.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이 누구인지 세심히, 독립적으로 생각해보자. 대형 에너지 기업이 제시하는 논거와 담론에 익숙해지자. "우리의 목적은 장단기적으로 이익의 균형을 맞추고 경제적/환경적/사회적 고려 사항을 통합하는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더 많고 더 깨끗한 에너지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이것이 차단, 지연, 필리버스터를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방법을 터득하자. "사람과 지구를 위한 에너지의 재구상이라는 우리의 목적은 BP의 사업 다각화 및 탈탄소화에, 그리고 주주를 위한 진정한 가치 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는 화석연료 사용을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수익성이 높은 녹색 기술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교묘히 감추는 빈말임을 이해하자. 녹색 메시지의 행간을 읽어내는 이런 능력은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시민에게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린워싱은 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온 '지속가능한' 무역이라는 눈속임에 빠르게 익숙해진 정치권의 전유물이기도 하다.

P260.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통쯤은 감수할 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당연한, 심지어 어쩌면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만족을 지연시키는 능력을 '최고의 미덕', 즉 그 밖의 다른 모든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출벌점이 되는 '핵심 덕목'으로 간주한다. 이런 식의 도덕적 담론은 경제계획과 환경계획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다. 전 지구적 환경위기가 교차하는 쓰레기 언덕에서 삼베 자루를 움켜쥐고 서 있는 소핍은 여러 가지를 상징한다. 소핍은 기후변화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가난한 국가의 시민이며, 자산은 거의 없고 부채는 많다. 그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세계에서 가장 오염이 심하고 탄소집약적인 산업 중 하나에서 나오는 쪼가리를 모아 생계를 건사하고 있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는 부유한 세계의 과소비가 유발한 쓰레기에 의존해 삶을 연장하고 있다. 유독한 패션의 찌꺼기에서 실존을 쥐어짜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핍은 우리 시대의 주요한 지속가능성 문제 대부분과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는 이 모든 문제의 바깥에 머물러 있다. 수출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의류 경제 안에서 살아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공급망 밖에서 그것에 의존해 살고 있다. 이런 비공식성 때문에 소핍이 야외에서 수행해야 하는 노동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를 착취한다고 지목할 수 있는 회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폭염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시간은 오롯이 그의 책임이다. 그는 열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선을 거부한다. 그는 지속가능성이라는 의무로 이뤄진 우리 세계의 너머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P262.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고 설명하며,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회적 담론이 환경붕괴와 관련해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중략) 나의 관점은 여러 해 동안 내가 기울인 관심, 내가 가진 특권,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관점이며, 다른 모든 관점과 마찬가지로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전 지구적 문제를 겪는 한 개인의 경험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 환경과 개발이라는 거대 담론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지속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체계에 만연해 있는 수많은 '블랙 스완'(규칙이 완전히 틀렸음을 입증하는 예외적 사건)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 즉 지리학적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말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P269.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산사태의 3분의 1 이상이 차 플랜테이션에서 비롯된다. 1990년 이후 스리랑카의 산사태 발생률은 26배 증가했다. 산사태의 80퍼센트는 '인간이 유발한 것'으로 분류된다. (중략, P270)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자연'재해를 바라보아야 한다. (중략, P271)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없었다면, 스리랑카의 고산지대에서 차를 재배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플랜테이션이 없었다면, 산사태는 훨씬 더 적게 일어났을 것이다. 여기에 추가적인 차원이 작용한다. 스리랑카는 차의 시장가치를 결정할 입장에 있지 않다.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역사를 거치면서 고착화된 환경적 취약성의 경제를 뒤집을 수 없다. 2세기에 걸쳐 배출된 탄소는 자연재해의 위험을 증가시켰을지 모르지만, 5세기에 걸쳐 이뤄진 지배는 자연재해와 맞닥뜨리게 되는 맥락을 형성한다.

P276. 기후붕괴의 부담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불공평하다. 평범한 사람들 대부분이 기후위기에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은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녹색 소비'를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농간을 부리는 것에 가깝다.

P280. 우리는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구조를 어느 정도로까지 규제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대신 우리가 승리했다고 생각했던 전장인 넷제로와의 '싸움'으로 도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전문용어로는 이것을 '오버턴 윈도Overton Window'라고 한다. 다시 말해, 대중적 담론의 영역을 [담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영국 우익 TV 방송국 <GB 뉴스
>의 진행자 마크 돌란은 그 훌륭한 본보기를 제시한다. "2019년에 넷제로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친환경 보일러에 2만 파운드를 지원하는 법안에 혹은 전기자동차 한 대당 3만~3만 5000파운드를 지원하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비록 옳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값비싼 친환경 의제에 대해 영국 대중에게 자문을 구해써야 합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대중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일입니다. 더 나쁜 것은 생태 광신도들의 오만함입니다. 녹색 로비를 벌이는 단체의 일부 회원들은 일종의 종교적 열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들은 당장 내일 아침부터 모든 에너지를 어떻게든 풍력에서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식단을 어떻게든 채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생태 저항가들 중 직업이 없는 이들이 상당한 것도 당연합니다. 비건 채식을 하면 시위할 기운도 없을 테니까요." 이런 식의 비아냥은 한 귀로 흘리자. 중요한 것은 [어조가 아니라] 이런 식의 발언들이 서로 반대되는 입장들을 하나로 엮는다는 것이니까. 일단, 생태 저항가들을 넷제로 정책 지지자들과 동일시할 수 없다. 실제로는 생태 저항가들이 넷제로 정책을 지지하기보다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넷제로는 파격적으로 추구해야 할 결과가 아니라 신화로 간주된다. 수많은 기후과학자들이 넷제로 목표를 위험한 함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미래에 탄소 제거 기술이 발명될 것이라는 추정을 바탕으로 당장 필요한 탈탄소화 노력을 기울이는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통합할 경우 반환경주의자들이 환경주의 진영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다. 환경주의의 영역에서 가장 보수적인 입장과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혼합한다고 가정했을 때, 가장 큰 승리를 거두는 것은 결국 현상유지를 주창하는 이들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그 수혜자는 누구인가? (중략, P282) 이들을 비롯한 그 밖의 다른 매체들은 노골적으로 부정하기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기나긴 논쟁과 토론, 의견 불일치로 주의를 분산시키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현상 유지를 타파하고 글로벌 경제를 급진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혼합, 위증, 필리버스터라는 순서로 진행되는, 이미 검증된 과정이다.

P288. 기후변화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대규모 수준에서 사고하는 방식은 환경에 대한 경험을 형상하는 무수히 많은 요인을 모호하게 만든다. 경제가 이런 영향을 형성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은 외면당하고, 소비가 주도하는 지속가능성과 기술적 해결책을 앞세우기 위해 경제 정의의 중요성은 폄하된다. 기후변화의 영향에 적응하는 문제에 관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가난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부유하게 만드는 것인데 말이다. 종말론적 기후 이주 담론이 그토록 해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담론은 대개 이주민에 대한 해로운 정치적 고정관념, 즉 그들이 절박하고 위험한 무리라는 틀에 박힌 생각과 이미지를 양산해낸다. 그로 인해 가장 시급한 조치가 무엇인지 사고하지 못하게 된다. 코앞에 닥친 재앙을 막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높은 장벽이 아니라 경제 정의이다. '대규모 실향'이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기후 담론의 단골 주제로 떠오르는 사이 그것이 막을 수 없는 일이 아니라는 점은 잊히고 말았다. 방파제는 홍수를 막을 수 있고, 선풍기는 폭염을 막을 수 있으며, 운하는 가뭄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돈이 있다. 부유한 세계는 전력과 자원을 비축하는 방식으로 다가오는 기후변화의 맹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부유한 세계가 글로벌 공장에서 더 공정하게 거래해야 한다.

P291. 탄소 배출을 유의미하게 추적하기 위해서는 공급망에서의 배출과 관련해 전 지구적인 관점을 취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부유한 국가들의 탄소 배출량은 현재 그들이 보고하는 수치보다 훨씬 더 나빠질 것이다. 부유한 정부들은 당연히 이런 지적을 반기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단일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정치적 권한은 한 국가의 국경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을 뿐 그보다 더 먼 곳에서의 변화를 요구하는 데서는 행사할 수 없다' 따위의 말만 듣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부유한 국가는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재화를 통제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 재화가 이런저런 조건을 준수해야 한다고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고, 자국의 국내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기준들을 적용하고 있다. 해외에서 배출되는 탄소와 환경저하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준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 부유한 국가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을 통해 우리는 부유한 국가들이 환경 정책에서 우선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전 지구적인 환경을 희생시킬지라도 자국의 영토만큼은 보호할 수 있는 환경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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