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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문화정치> - 사라 아메드 본문

감정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남자든 여자든, 좌파든 우파든, 페미든 안티페미든 모두 서로에게 감정적이다. 난 내심 그들이 소통에 실패하는데 감정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해 왔다. 사람들은 개별적 상대를 앞에 뒀을 때도 그 상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 그리고 맥락과 싸우고 '끈적이는 기호'와 싸운다. 그리고 끈적이는 기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순식간에 상대에게 전이되어 곧 감정의 원인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을 꽤 겪어 왔다. 주로 나의 발화와 행동을 내가 고려하지 못한 특정한 맥락 속에서 읽은 상대에게 '갑작스럽게 증폭하는' 부정적인 감정을 맞닥뜨려야 하는 일이었다. 크게 정치적 입장이 다르지 않아도, 정서적 거리가 꽤 가까워도 그런 일들이 꾸준히 발생했다. 증폭된 감정을 감당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 소모를 야기했고, 때로는 서로의 본래 의도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나는 사건 해석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직관과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일상 속 갈등에서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찾았다. 책에는 감정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한 설명이 풍부했으나, 그런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치 않았다. 내가 특히 아쉬운 점들은 이것이다.
1. 책은 인간의 윤리적 소양을 고평가한다. 사람은 윤리적 가치에 그리 예민하지 않다. 책의 제언처럼 더 윤리적인 방법을 고민하며 세상의 이치와 스스로의 판단을 불편해하는 일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는, 윤리적으로 고도로 훈련된 이들마저 불완전하게 체화하는 '규율'에 가깝다. 감정은 지금까지 쌓인 주관의 역사를 따라 거의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며, 이때 그 감정을 거역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느낌이 우리를 움직인다".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느낌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책의 주장이 무의미해지며, 높은 윤리적 책임감을 가진 이들에게 부하가 따른다. 외면은 쉽고 응시는 어렵다. 응시가 더 많은 시간을 요하는 판단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정동의 동요 없이" 따르게 만드는 '법률'이 윤리에 관한 보편적 방법론이자 최선(차악)이 아닐까? 페미니즘은 과연 국가를 대신해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감정)투쟁을 막을 수 있는가?
2. 감정을 추적할 수 있더라도 결국 신뢰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서로 같은 '느낌(모호하고 흐릿하면서도 관념과 가치로 채워진)'을 '공유'한다고 느끼는 순간에 대상은 물질화되기에 감정은 의사소통이 어긋나는 일을 수반하고, 자아는 정동적 충동을 지각하지만 잘못 해석하며, 정동적 충동은 별개의 아이디어로 미끄러진 후 타자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모두가 이 '감정의 문화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감정의 문화정치를 깊이 이해함으로써 감정을 활용해 타자에게 압력을 가하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사람들과 사회구조를 비판할 수 있다는 의의가 있더라도, 감정을 올바름을 추구하는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이 생기진 않는다. 감정은 늘 정확한 원인과 결과를 지목할 수 없는데다, 결코 '동력'에 머무를 수 없으며 어느새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책은 감정을 강조하는 일이 분명한 위험을 수반한다고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부당함에 저항해야 할 때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구조적 문제를 공적으로 비판할 때 감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건 꽤나 적절할 것이다. 감정 자체가 세계의 역사를 타고 끈적이며 흘러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보이는 사회구조가 사실은 필연적이지 않음을 밝히기에 좋은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개인과 개인 사이의 대화에서는? 세계와 역사와 끈적임에 대한 분노를 개인에게 투사하는 것이 정당한가? 책에 따르면, 정동적인 속성이 대상에 내재하고 나면 대상은 역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개인을 특정한 정동적 해석을 거쳐 비판하게 되면, 그 해석이 일견 정확하더라도 이는 대상의 모든 역사에 기반할 수 없으며, 막상 '대상'의 모든 역사를 체화하고 있는 '대상' 자신에게 반감을 일으킨다(나는 이 반감에 대한 해석이 책에서 묘사된 것처럼 '버르장머리 없는 발화자를 언어적 명령으로 침묵시키려는 수신인의 분노'인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감정을 신뢰할 수 없다고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집단적 독백이 아니라 대화를 위해서라면, 상대의 발화와 행동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순간에조차 스스로의 감정 역시 '항상' '모든 면'에서 정당한 건 아닐 수 있다는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결국 불쾌함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왜 불쾌한지', '상대에게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우선 필요하다. 그리고, 초등학생 남자애처럼 질문해 본다. 그래서 감정과 감정이 싸우면 그래서 누가 이기는데? 더 센 사람이.
3. 나는 책이 소위 '혐오 세력'이 감정을 통해 사회구조를 공고히 하고 무언가를 은폐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비판했지만, 감정이 (저자가 우호적 입장을 가진) 약자와 소수자, 타자의 '동력'이 될 수 있다고 결론지으며 막상 그 집단에 끈적이는 감정이 불어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서술하지 않았다고 느낀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감정이 달라붙는 일은 진영을 막론하고 벌어진다. 감정은 어느 누구의 편도 아니고 그저 인간의 특성이자 수단이며, 어떤 진영에서 감정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 기능한다면 반대 진영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책에서 묘사된, 다문화주의 국가가 오히려 차이를 지우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과정은 자신을 선하고 관용적인 주체로 믿는 페미니스트 집단에서 TERF가 탄생하는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흑인이나 아랍인과 같은 인종적 타자에게 무차별적으로 품는 공포와 역겨움은 일부 여성이 밤거리, 엘리베이터, 대중교통에서 남성을 마주쳤을 때 느끼는 무차별적 공포, 역겨움과 작동원리가 유사하다. 어떤 남성이 '디지털 테러리스트'일 지 모른다며 정부의 정보 수집, 감시 권한 확대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집단 내에서의 일부 증언들은 분노와 화를 공유하며 한국 남성 전반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하고, 이 과정에서 '퀴퀴한 냄새', '튀어나온 배'와 같이 꾸밈노동을 하지 않는 것에 관한 외형적 혐오를 연결짓기도 한다. 몇몇은 페미니즘의 적 형상을 열등한 모습으로 규정하고, 그 형상에 접촉할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마치 이민자 수용을 반대하는 이들처럼, 안전을 침범당하지 않기 위해 집단에 타자를 받아들이는 기준을 높이거나(여초 커뮤니티의 회원가입 제한 경향성), 여성과 남성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싶어한다(각종 여성 전용 시설물 요청). 나는 "정치적 이상이 물화되어 주인공의 자리에 놓인" 페미니스트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페미니즘이 맞서는 것이 페미니즘의 외부에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언급이 반가웠지만, 마치 감정의 '부정적'인 효과는 기득권과 주류 집단에서 주로 발생하고, 감정의 '긍정적'인 효과는 타자로 규정된 집단에서 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긍정적/부정적 효과를 분리해서 취할 수 있는 것처럼) 서술한 책의 전개는 불만족스러웠다.
4. 책의 결론은 두 가지다. 감정이 작동하는(끈적이는) 과정을 분석해서 기득권, 혹은 국가가 어떻게 스스로를 재생산하는지, 그것이 왜 부당한지 비판하자. 그리고 그 비판의 동력을 (부정, 긍정 모두의) 감정이 주는 힘에서 찾자. 저자는 이렇게 주장하면서도 감정을 선명하게 규정하는 것을 위험하다 생각했기에 끊임없이 '불편함'을 가지고 세계를 대해야 한다거나, 타자의 영향을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가 느낌을 가지고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안다고 확신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로 책의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한다. 나는 이 결론이 "결국 논리의 허점을 감정으로 보완하는 상대를 어떻게 설득하고 경청하게 할지", "막상 우리는 감정을 언제 내려놓아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을 그저 질문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기에 나온 미온적 결론이었다고 느낀다. 나는 여전히 감정은 그 자체로 근거나 자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느낀 그대로의 감정을 상대가 느낄 수 있게끔 표현해서 감정의 형태나 진실성을 강조하기보단 왜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지, 그 서사가 타당한지 의견을 주고받는 화법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앞으로 대화를 할 때 인간이 결코 감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나 역시도 그러하다는 것), 그리고 대상이 품은 감정, 대상에 대한 감정이 대상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더 확실하게 의식할 수 있었으면 한다. 결국 감정에 덮여 있는 상대의 얼굴을 더듬어 보는 애정과 의지의 문제다. (이것은 자유인가, 의무인가?)
P29. 냉정함은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하는 또 다른 감정이다. 타자에 대한 분노는 타자와 멀리 거리를 두려는 몸으로 표면화된다. 우리는 보드라운 몸 '안'에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감정은 바로 몸의 표면을 형성한다. 몸의 표면은 오랜 기간 행동이 반복됨으로써, 타자를 향하거나 타자에게서 멀어지는 방향 설정을 통해서 모양을 갖춘다. 우리와 타자가 접촉하는 일이 우리가 하는 행동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감정에 주목하는 일은 모든 행동actions이 반응reactions임을 알려준다.
P35. 감정은 감정이 만들어내는 대상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형성된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대상을 물리적 실체로 가정하지 않는다. 내가 "관련을 맺은" 대상은 상상의 것일 수도 있다. 예컨대 무언가에 대해 내가 지닌 기억은 어떤 느낌을 촉발할 수도 있다. (중략, P36) 우리에게는 문화적 역사와 기억이 형성한 곰에 대한 이미지가 있다. 곰은 두려워해야 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곰에 대한 인상은 피부 표면에서 느껴지며, 위험에 대한 지식은 명백히 신체적이다. 아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망칠 것이다. 그러나 반응이 '즉각적'이라고 해서 매개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곰은 이를테면 '그 자체로'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서운 것이다. 공포는 곰은 물론이고 아이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포는 아이와 곰이 어떻게 접촉했는가에 대한 문제다. (중략, P37) 우리는 곰과의 접촉에 대한 '해석'이 곰을 공포라는 느낌의 원인으로 인식하도록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이는 무서워하게 되고 곰은 무서워진다.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당신이 무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처럼) 느낌의 원인을 대상에서 찾는 일은 마주침의 효과이며, 이는 주체를 대상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처럼 감정은 정동적인 차원에서 대상에 대한 방향을 다시 설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P42. '감정의 전염' 모델은 감정을 개인이 가질 수 있고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할 수 있는 소유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이 모델은 단순히 이론적 측면에서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내 경우에는 내가 상대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고 그 느낌이 마치 '공간을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나와 상당히 다른 감정을 느꼈음을 깨달았던 사회적 경험이 많이 있다. 이와 같은 공간은 '강화된intense' 곳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핵심은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으로 이는 짙게 깔린 공기나 분위기처럼 강화된 공간에 있는 이들을 감싸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긴장감을 높일 뿐 아니라, 긴장 상태에 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느낌을 공유한다고 느낄 때도 그 느낌과 동일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강화된 감정은 의사소통이 어긋나는 일을 수반하기도 한다.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같은 느낌을 느끼는 것 혹은 함께 느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대상이 순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61. 서구는 애초에 서구가 이미 타자의 것을 빼앗아버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비로소 타자를 후원한다. 고통과 괴로움이라는 느낌은 실제로는 폭력과 빈곤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관계로 인한 것임에도 소식지는 바로 그러한 사회경제적 관계로 인해 서구가 지닐 수 있던 너그러움이 고통과 괴로움을 줄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는 타자에게 무언가를 주는 순간에 타자의 것을 가져가버리는 일을 되풀이하고 동시에 이를 감춘다.
P70. 레더에 따르면, 몸이 문제 없이 기능할 때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몸이 역기능적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몸에 가장 집중하게 된다. 즐거움은 몸을 다른 이들에게 열려 있게 하는 반면, 고통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게 한다.
P71. 다른 어떤 것이 몸으로 침입해오는 것 같은 느낌은 경계를 새로 설정하려는 욕구, 즉 우리가 고통 혹은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상상의 또는 물리적인) 대상을 몰아내려는 욕구를 일으킨다. 애초에 우리가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이 경계를 침범하기 때문이다. (중략) 고통이 내게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은 고통이 이를 느끼는 내 몸 안에 있음에도 나의 일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고통은 '내' 안에 있는 '내가 아닌' 어떤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처는 다른 존재의 표면이 내 몸에 남긴 흔적의 자취로 기능한다. 여기서 몸에 남겨진 흔적은 나를 부정하는 폭력으로 느껴지고 이해된다. (중략, P74) 상대가 우리에게 상처를 줬다고 느낄 때면 그러한 느낌은 상대에 대한 해석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이에 상대는 상처를 일으킨 존재가 되거나 부정적인 인상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정동적 반응은 일종의 해석으로,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경계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행동을 통해서 타자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P81. 정치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상처를 받았다는 호소로 바뀜에 따라 정치적 주장은 (사회, 국가, 중산층, 남성, 백인 등)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게 맞서거나 이를 부정하는 반응에 머물게 된다. 니체의 논의를 따르는 브라운은 상처에 반응하는 방식을 정치의 기반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반응이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응한다'는 의미에서 복수는 행동에 나서는 역량을 대체한다. 복수는 정체성 또한 만들어낸다. 복수가 만들어내는 정체성은 정체성을 생산하는 역사에 얽매인 것이자 그러한 역사가 체화된 현재를 비판하는 것으로서 생산된다". 니체의 논의를 다시 살피는 브라운의 작업은 상처에 지나치게 투자하는 일이 "상처에 대한 투자를 끝내야 할 필요와 충돌"하는 맥락을 보여준다. 나는 상처를 정체성으로 바꾸는 일이 상처를 물신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상처를 입고' 피해를 겪는 일에는 역사가 있다. 그러나 상처를 정체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처를 그러한 역사로부터 단절시킨다. 결국 상처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상처의 물신화는 "증언 문화"의 핵심을 차지한다. 증언 문화는 고통과 상처의 서사가 급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는 이야기를 통해서 상처는 언론의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다른 이들의 고통은 슬픔과 분노가 아니라 웃음과 흥미를 자아낸다. "집단적 고통은 전 지구적 정치경제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고통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피해자의 위치는 상품이 된다". 어떤 고통은 '우리의 상실'로 더욱 쉽게 전유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통보다 자주 언급된다. 이야기되는 고통과 그렇지 않은 고통이 갈리고, 이야기되는 고통 가운데서도 서사의 형태가 나뉘는 일은 권력을 분배하는 메커니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P83.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보상 문화를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상 문화는 모든 피해가 유무죄를 따지는 문제와 연관된다고 간주하고, 피해에 대한 책임을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물을 수 있다고 전제한다. 법은 고통을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상태로 바꾸고, 이는 보상을 요구하는 근거로 쓰인다. 상처를 물신으로 만드는 일이 문제인 이유는 서로 다른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전제한다는 데 있다. 모든 피해를 동등한 것으로 가정할 때, 피해는 자격의 문제가 된다. 모두가 피해를 겪은 당사자로서 똑같은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규범적 주체가 피해의 서사를 통해 보호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컨대 국가 담론에서 백인 남성 주체는 피해를 겪은 집단이 된다. 국가를 타자에게 개방함으로써 '상처를 받았다'는 것이다. 모든 주체가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결국 더 많은 특권을 지닌 주체가 피해의 서사를 더 많이 활용하게 된다. 즉 공적 자원에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일수록 공적 영역에서 피해의 서사를 활용할 역량도 더 많이 지닌다.
P88. 호주 원주민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지만, 백인 청자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폭력의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와 같은 서사에서 화해는 수치심을 드러냄으로써 과거를 청산한 백인 국가에 원주민 개개인이 포함되는 일이 되고 만다. 피오나 니콜이 지적하듯이 여기서 화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 화해는 인정하는 일을 뜻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자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일(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과도 연관된다. 호주 정치에서 화해의 서사(와 타자의 고통을 경청해야 한다는 서사)는 원주민 타자를 백인 국가와 백인 공동체에 포함시키는 일로 지나치게 자주 이어지고는 한다. 빼앗긴 세대의 상처를 인정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있다는 정체성"을 마련한다.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는 일이 우리가 국가적 고통을 주장하는 일로 쉽게 미끄러지면서 상처의 치유가 국가의 치유로 재현되는 것이다. 몸으로 형상화된 국가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고통에 반응하면서 원주민의 몸을 대신한다. 원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석하는 일, 타자의 몸(여기서는 국가의 몸)을 회복시킨다는 이유로 타자에게 공감하는 일은 폭력을 수반한다. 그러나 타자의 고통이 국가의 고통으로 전유되고 타자의 상처가 국가의 손상된 피부로 물신화되는 일에 대해 타자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을 듣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고통에 응답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원주민이 아닌 청자는 (고통을 일으킨 역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원주민의 고통을 자신의 일로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원주민의 증언을 원주민에게서 빼앗아버리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증언은 우리의 느낌에 관한 것도, 그들의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P106.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체는 정동적 충동을 지각하지만 잘못 해석하며, 정동적 충동은 또 다른 아이디어와 연결된다. 의식에서 억압된 것은 정동적 충동과 같은 느낌이 아니라 이미(그러나 잠정적으로) 연결된 아이디어다. 정신분석학은 증오와 같은 감정이 움직임과 연상의 과정을 수반한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를 통해 느낌은 우리가 다양한 수준의 의미화 과정을 가로지르도록 한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모든 여정을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략) 증오는 공시적인 차원에서 형상 사이를 미끄러지는 모습도, 연상 작용을 구조화하는 과거 역사를 다시 불러일으키면서 통시적인 차원에서 미끄러지는 모습도 나타난다. 증오는 이러한 미끄러짐을 통해 특정한 몸을 '우리가 느끼는 증오'의 원인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P116. 증오가 특정한 타자를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 위치 지음으로써 타자에게 어떤 의미나 힘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증오는 일종의 투자로 작동한다. 하지만 증오가 타자에게 부여한 의미나 힘은 실증적 현존으로, 다시 말해서 타자에게 실증적으로 존재하는 특성으로 간주된다. 투자라는 의미에서 증오는 주체와 상상된 타자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조율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여기서 타자는 주체 외부로 밀려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은 증오를 투사로 설명하고는 했다. 타자를 증오하는 주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모든 것을 상대에게 투사하고, 이러한 투사의 흔적을 모두 감춘 후에 타자가 원래 그러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그러나 투사는 증오가 안에서 밖으로 움직인다는 통념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주체 안의 부정적 느낌이 타자를 향하는 증오의 '원인'이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 '안'에 있는 부정적 느낌 역시 효과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증오에 따른 효과일 수 있다.
p117. 증오를 일종의 친밀성으로 이해하는 일은 증오의 양가적 속성을 드러낸다. 증오는 (증오의) 대상에 투자하는 일이다. 대상이 일으키는 위협은 주체 밖에서 시작된 것처럼 인식되지만(혹은 그렇게 인식되기 때문에) 대상은 주체의 일부가 된다. 이에 증오는 사랑의 반대편에 놓일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주체는 증오를 통해서 타자에게 애착을 형성하고 주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중략, P119) 대상에 대한 애착은 긍정적인 느낌이 부정적인 느낌으로 전환되는 일을 통해 지속된다. 데이비드 홀브룩은 <증오의 가면>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대상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증오한다는 것은 대상을 과도하게 욕망한다는 뜻이다". 증오의 대상은 주체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주체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주체의 욕망이 대상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체가 대상 자체를 바라는 것도, 대상이 그저 결정 요소인 것도 아니다. 주체는 대상과의 파괴적 관계를 바란다. 그렇게 주체는 증오가 만들어낸 애착에 붙들린다. 크리스토퍼 볼러스는 파괴하는 증오와 '사랑하는 증오'를 구분한다. 볼러스에 따르면 사랑하는 증오는 대상을 보존하려는 감정이다. 파괴적인 애착과 보존하려는 감정은 서로 포개어진다. 대상과의 파괴적인 관계가 유지되려면 대상 자체는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증오는 상대를 추방하거나 통합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꿔낸다. 이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 대상에 대한 증오에 언제나 선행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다만 증오는 애착이라는 양식을 통해 대상이 계속 존재하도록 만들며, 그 방식은 사랑과 유사한 역학과 다른 지향을 지닌다. 미켈 보르슈자콥생이 이야기한 대로 "증오는 타자를 손아귀에 사로잡으려고 한다. 타자를 파괴하려고 할 때조차 타자와 접촉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P122. 사랑하는 이들에게 동일시하고 증오하는 이들에게 비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와 대상이 연동되고 사랑하는 이들의 특성이 주체와 애초에 '닮은 것'으로 생산된다. 주체는 어떤 타자와 동조함으로써 다른 타자와는 적대한다. 동일시를 "포기하는 일"은 증오의 대상이 지닌 속성을 자신과 '닮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감정은 대상을 사랑할 만한 타자와 증오할 만한 타자로 구분한다. 비/동일시는 감정의 이유를 제공하지도 감정에 선행해서 존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나와 닮았기 때문에 사랑하고 나와 다르기 때문에 증오한다. 증오의 대상이 순환됨에 따라서 역으로 타자는 증오의 원인으로 간주된다. 증오는 증오가 생산하는 적대감의 '원인'을 타자의 모습에서 찾아내는 방식을 통해 작동한다. 증오는 주체와 닮은 특성과 닮지 않은 특성을 생산함으로써 작동하고, 우리는 타자가 우리와 닮거나 닮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때 증오가 생산해낸 특성을 인용한다.
P128. 증오범죄의 핵심은 개인의 몸에서 집단을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증오범죄 방지법에 명시된 "이유"라는 표현은 증오범죄의 핵심이 되는 인식 과정을 감춘다. 증오범죄 방지법에 "이유"가 명시된다는 점은 집단 정체성이 법 제정 이전부터 존재하며 범죄의 원인으로 작동한다는 가정을 시사한다. 그러나 집단 정체성은 범죄의 효과로도 나타난다. 증오범죄가 개인의 몸에서 집단을 인식하는 일을 수반한다는 사실은 범죄가 실제적이지 않다거나 '직접적'이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집단을 인식하는 일이 범죄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한 인식은 물질적 효과를 지닌다. 즉 증오범죄는 개인의 몸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집단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은 타자의 정체성을 고정하고 봉인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가해자가 느끼기에 특정한 정체성을 체현하도록 가해자에 의해 강제되고, 이러한 강제는 피해와 상해를 일으킨다. (중략, P129) 어떤 이들은 증오범죄 방지법이 권력의 문제를 마음의 문제로 혹은 마음의 문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바꿔놓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법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앤재닛 로즈거는 증오범죄를 범죄의 한 형태로 규정하는 일은 "편견과 증오를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억압을 개인화하는 모델을 뒷받침할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비판은 유용한 측면이 있으며, 감정을 심리적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대한 투자로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P145. 두 몸 사이를 지나가는 정동은 상대의 느낌을 이해(오해)하는 데 기인한다. 백인 아이가 흑인 남성이 몸을 떠는 모습을 분노에 찬 상태로 오해하는 것이 선행하고, 이를 자신이 느끼는 공포의 '원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잇따른다. 다시 말해서 주체가 오해함에 따라 타자는 비로소 무서운 존재로 여겨진다. 주체의 오해는 타자를 거쳐 주체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즉 타자는 백인 아이가 자신에게 공포를 느낀다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백인 아이는 그러한 타자의 공포를 공포의 원인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포가 백인 아이에게서 시작됐다는 뜻은 아니다. 백인 아니는 공포의 시작점(더 나아가 공포의 원저자)이 아니다. 공포는 연상 작용을 구조화하는 과거 역사를 환기하고, 이는 백인 몸을 흑인 몸과 구분된 것으로 현재 시점에 구성한다.
P146. 정형화된 이미지는 마치 당연히 그러하다는 것처럼 타자의 존재에 대한 고정된 설명을 반복한다('검둥이는 원래 그래'). 정형화된 이미지는 타자의 의미를 고정하려고 한다. 의미를 고정하기 위해서는 이미지를 반복하는 일이 필수적인데, 호미 바바가 지적하듯이 정형화된 이미지의 반복은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기보다 불안하게 만든다. 이미지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전형성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P173. 공포와 불안은 우리가 아닌 것을 만들어낸다. 안전은 이처럼 '무엇이 아닌 것'의 영역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일을 수반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무엇이 아닌 것'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안전을 보장하려는 기획은 오히려 '무엇이 아닌 것'이 놓인 불안정한 상태가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중략) 공포와 불안은 실제로 발생한 위기로 인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결과가 아니다. 위기가 발생했다는 선언은 사실, 인물,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며, 사실, 인물, 사건을 물신 대상으로 만들어낸다. 사실, 인물, 사건은 해석을 통해 특정한 의미를 지닌 물신 대상이 됐음에도 원래부터 그러한 의미가 있던 것처럼 보이게 되고, 이는 안전을 위협하는 원인으로 지목된 것에 맞서 전쟁을 선포하는 이유가 된다.
P177. 타자의 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은 타자에 맞서 공동체를 지키는 일이 끝없이 지속되도록 만들며, 결과적으로 이를 통해 현재가 보존된다. 타자가 규범을 닮은 모습으로 물질화되지 못했다고 할 때, 이에 따라 우리가 타자가 어떤 모습을 지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할 때, 타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끊임없이 감시하는 정책은 공동체의 생존을 보장하는 기획으로 언제까지나 계속된다.
P179. 누구나 테러리스트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특정한 몸과의 연관성이 없다는 점은 [애초에] 테러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이들, 즉 무슬림 아랍계 아시아게 동양인 등의 이동성을 제한하도록 한다. 공포는 끈적이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공포는 이들 몸을 가로질러 미끄러지기도 한다. 테러리스트가 우리 곁을 지나갈 수 있다는 구조적 가능성은 정보 수집, 감시, 구금 권한의 확대를 정당화한다. 공포가 어떤 이들의 이동성은 확대하고 어떤 이들은 가두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은 바로 공포가 특정한 몸에 실증적으로 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P193. 경계가 경계로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경계가 위협받아야 한다. 경계의 위반을 통해서 경계가 유지되는' 과정 가운데 경계 대상border objects이 나타난다. 경계 대상은 역겨운 것이 퇴고, 역겨움은 경계 대상을 탄생시킨다. 결과적으로 역겨움은 발생적이고 미래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시차'와 연관된다. 역겨움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경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경계의 필요성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경계 만들기에 반응한다. 즉 주체는 대상이 역겹다고 느끼고 (이러한 인식은 대상과 마주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역사에 기초한다) 대상을 물리치며, 물리치는 행동을 통해서 대상을 역겨운 것으로 이해한다. 물리치는 행동 자체가 대상을 역겨운 것으로 해석하는 일이 '진실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P197. 역겨움을 드러내는 반응은 주체의 경계선을 위협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주체보다 "밑에 있는", 주체 '아래'에 있는, 더 나아가 주체보다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중략) 역겨움을 느끼는 사람은 [역겨운 대상으로 인해] 역겨움을 느끼게 된 사람이라는 점을 떠올려보면 '위쪽'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특정한 취약성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P198. 끈적이는 것은 대상이 표면에 모은 것을 통해 대상이 어디를 여행해왔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대상이 표면에 모은 것들은 대상의 일부가 되며 대상의 통합성에 문제를 제기한다. 끈적임이 이러한 효과의 연쇄와 관련이 있다는 점은 왜 어떤 것은 애초부터 끈적이는지 파악하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이는 어떠한 물체가 (지금 여기에서) 끈적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끈적임이 대상의 [본질적인] 특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끈적임이란 대상이 다른 대상에 하는 것으로, 정동의 전이를 수반한다. 기호는 어떻게 끈적이게 되는가? 기호는 반복을 통해 끈적이게 된다. 어떤 표현이 특정한 방식으로 반복돼서 활용되다 보면 그 '활용'이 표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된다. 일종의 기호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략, P203) 일단 기호가 끈적이게 되면 다른 표현들은 사용하지 않아도 무관하다. 결과적으로 '파키'라는 말은 이주자, 외부인, 더러움 등 직접 언급되지 않은 다른 말과 달라붙는다. 의미를 만들어내는 표현 사이의 연상 작용은 감춰지며, 연상 작용이 감춰지는 일은 기호가 정동적 가치를 축적하도록 만든다.
P206. '역겨워!'라는 발화 행위처럼 무언가를 역겨운 것으로 명명하는 일은 수행적이다. 이는 기존의 발화 규범과 규약에 의존하며, 대상을 역겨운 대상으로 고정시킨다.
P212. 역겨움을 공유하는 일은 역겨운 것을 삼켰다는 점(다시 말해서 역겨운 것이 매 순간 자신의 삶을 물들인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화를 공유하는 일이 된다. (중략, P215) 역겨움이 어떤 몸에 달라붙는 일은 다른 이들 역시 테러리스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에서 결코 끝나지 않으며 또 다른 효과를 발생시킨다. '그건 역겨워!'라는 발화 행위는 '저 사람들은 역겨워'로 바뀌고, 다시금 '저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역겨움에 시달리고 있어'로 이어진다.
P218. 역겨움은 무언가를 쫓아내야 한다는 정언명령일 뿐만 아니라 추방이 특정한 것에만 달라붙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정언명령으로서, 단순히 집단적 생존의 수단으로 정당화된 것을 보호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역겨움은 역겨움이 집단적 생존의 수단으로 이루어낸 것에 대한 역겨움을 수반하기도 한다. 역겨움의 순환 고리는 이견이 자신이 반대하는 대상 외부에 존재할 수 없음 또한 알려준다. 이견은 언제나 자신이 반대하는 것과 연루된다. 더 나아가 정동적 반응으로서 역겨움이 지닌 한계는 개인이 '이상한 것'으로 규정한 것을 소화할 시간을 개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비판이 '이상한 것'을 소화해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요청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역겨움은 대상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전부터 대상에 충분히 다가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P219. 역겨움을 역겨움의 대상으로부터 떼어놓는다고 해서 역겨움의 경제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를 서로 달라붙게 만드는 것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역겨움을 드러내는 반응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역겨움 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역겨운 대상에서 멀어지는 일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에서 '역겨움'을 나타내는 기호가 대상에 다시 달라붙도록 만든다. 역겨움의 대상은 집단적 전이의 효과로서 눈에 띄게 된다. 즉 떼어진 것은 언제든지 다시 달라붙을 수 있으며 심지어 새롭게, 더 단단하게 달라붙을 수도 있다. 무언가를 고수한다는 것은 단순히 표면에 달라붙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지를 보내고 충성을 보인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동시에 주어지는 두 가지 질문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끈적이는가?'라고 물어야 한다(이 질문은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희망적인 질문도 던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충성의 조건을 끈질기게 거부할 수 있는가?'
P235. 수치심을 느끼지 않으려면 주체는 사회적 이상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사회적 유대의 '계약'에 참여해야 한다. 주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주체가 규범적 존재의 각본을 따르지 않아서 발생한 정동적 비용을 치른다는 뜻이다. 규범적 존재의 각본에서 벗어난 사랑은 수치심의 '원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예를 들어 서로 사랑하는 핵가족 '형태'에서 벗어난 퀴어 욕망은 주체에게 수치심을 일으킬 수도 있다. (중략) 수치심은 주체를 길들이는domesticating 느낌이자 그렇게 길들여진 주체가 경험하는 느낌이다.
P236. 수치심이 주체를 회복하는 일은 사회적 이상에 부합하지 못한 주체의 실패가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임을 '보여줄' 수 있을 때만 일어난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수치심은 우리를 다른 이들과 결속한다. 수치심이 우리를 서로 결속하게 하는 사랑을 확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주체와 그러한 수치심을 목격하는 타자의 관계는 불안을 일으킨다.
P259. 기존의 권위에 기대어 책임을 회피하는 것, '우리가 합의했다'가 아니라 그렇게 '합의됐다'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책임을 감당할 주체가 등장하는 일을 막는 것은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또 다른 행동에 해당한다. 여기서 책임 회피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무엇이 '말이 되는지', 무엇이 '상식인지', 무엇이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한 것인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역사는 현재의 부정의와는 단절된 "아주 오래전"의 일로 간주된다. 총리 대변인이 발표한 입장문에 따르면 역사는 과거의 일이다.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것이지 과거는 그저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사과를 거부한 일이 현재를 과거와 '단절하는' 일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때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책임이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책임의 범위를 한정하는 일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까 있을 때만 책임이 발생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이는 "아주 오래전' 일어난 일이 전 세계의 자원을 국가와 대륙에 따라 불평등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분배하는 현대 국제 정치의 부정의에 지금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망각할 때에야 가능한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사과를 거부하는] 발화 행위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현재의 투쟁을 과거와 단절시킴으로써 [사과를 요구하는] 발화 행위를 이를 둘러싼 맥락에서 단절시킨다.
P263. 국가적 수치심이 지닌 위험은 수치심이 무엇을 하는지 불명확한 상황에서 수치심이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할 가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이에 수치심을 공적으로 나타내는 일을 통해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바꾸고 사과하는 발화 행위를 '끝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치심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부끄러운 일을 적당히 넘기는 것이다. 정치적 수사가 '수치심'을 적당히 넘기면서 '미안함'을 안타까움'으로 바꾸는 일 역시 우연이 아니다.
P286. 투자한 것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는 사랑의 환상이 지속되려면 방해 요소가 필요하다. 투자한 것을 되돌려받지 못한 일의 '원인'으로 타자의 존재를 지목할 때, 타자의 존재는 국가에 대한 투자가 지속되는 데 필요한 것이 된다. 이처럼 상처의 이유로 간주된 타자의 존재에 의존하는 일은 투자한 것을 되돌려받지 못한 일에 계속 투자하는 일로 이어진다.
P291. 다문화주의 국가와 동일시하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개인이 자신을 선하고 관용적인 주체로 믿게 된다는 데 있다(Salecl). 이처럼 다문화주의 국가와의 동일시는 다문화주의 자체의 '특성'을 형성한다. 한편 다문화주의 국가와의 동일시는 [사랑의] 대상인 국가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구조적 가능성에 의존한다. 예컨대 편협한 인종주의자들은 다문화주의 국가 자체를 빼앗아갈 수 있는 이들로 지목된다. 이들은 다문화주의 국가가 스스로에게 가지는 좋은 이미지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들뿐만 아니라 사랑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주자나 난민 신청인도 다문화주의 국가를 빼앗아갈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국인으로 정체화한다는 것은 타자에게 줄 수 있는 혹은 주게 될 사랑에 어떤 조건을 붙일지 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P294. 사랑은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화합을 약속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국민이 단결하는 일에 필요한 '공유된 특성'이 된다. 그렇게 사랑은 "자아 혹은 자아 이상의 자리에 놓인" 대상이 된다(Freud). 이제 개인이 공동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감정을 '가져야' 한다. '나의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내가 '상대 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다"(Barthes). (중략, P295) 국가와 국가를 상징하는 주체는 안전을 보장하는 조건이 먼저 충족되야 이주하는 타자를 ("끌어안고") 사랑할 수 있다. 타자를 사랑하는 일은 국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우선 [설정하고] 보호하는 것을 요청하며, 이는 이주하는 타자에게 '우리의' 조건을 충족할 것을 요구하는 일로 이어진다. 국가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 이를 통해 타자에게 사랑을 건네줄 유일한 방법은 국경을 높이는 것이라는 주장에 힘입어 [동화주의에 기초한] 난민 제도와 시민권 담론은 정당화된다.
P299. 한편으로 인종 소요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는 일을 약속한 사랑이 이를 실현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국가 이상의 실현을 방해하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설명은 사람들이 서로 가까이 지내며 사랑하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폭력이 발생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랑을 요구하는 일로 이어진다. 인종 간의 분리가 인종차별로 인한 결과가 아니라 인종차별과 폭력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 따르면 서로 가까이 있는 일은 함께 어울리는 일이자 타자가 국가 이상에 포함되는 일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가까워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을 거에요"라는 서사인 셈이다.
P300. 다원주의가 합의로 바뀌는 일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타자는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동의해야 한다. 차이야말로 다문화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공통으로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차이는 닮음의 승격된 형태 혹은 승화된 형태가 된다.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차이를 사랑함으로써 타자는 우리를 좋아해야like 하고 우리를 닮아야be like 한다.(이때의 차이는 국가가 용인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차이, 국가의 이상적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는 차이만을 뜻한다). (중략, P301) 차이에 대한 사랑은 주체로 형상화된 국가가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주체 자신을 재생산하려는 욕망을 가리킨다.
P304. 사랑의 이름으로 말하는 일은 타자를 이미 '나의 것' 혹은 '우리의 것'으로 삼은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존재로 규정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다.
P356. 퀴어가 세계를 퀴어하게 만들 수 있는 이유는 퀴어가 세계를 초월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퀴어 희망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무엇이 아닌 것' 이라는 부정적 꼬리표를 견디는 삶의 형태를 끈질기게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퀴어 희망은 정동적이다. 퀴어 느낌을 애초부터 퀴어한 것으로 만드는 규범과 가치가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점을 퀴어가 이야기하는 한, 퀴어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간직한다.
P364. 감정과 이성의 대립 구도가 페미니즘과 여성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두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페미니즘이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이러한 대립 구도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적절한 대응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감정을 '사유가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 그리고 '합리적 사고'를 감정과 무관하다거나 타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다.
P367. 나는 페미니즘이 비판의 대상을 초월'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스트 애착을 실패를 뜻하는 기호로 해석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 애착은 '규범에 맞서는' 정치가 사회적 규범이 지닌 힘을 멈추게 하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무언가에 '맞서는' 정치를 포기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무언가에 '맞서는' 정치를 무엇이 '아님'을 주장하는 정치로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비판적인 성격을 지닌 정치가 무언가에 '맞서는' 것이 아니기란 불가능하다. 폭력, 부정의, 불평등의 역사가 변화에 대한 요구와 희망을 구체화한다고 할 때, 비판적인 정치가 이러한 역사에 담긴 정동을 단순히 냉담한 태도로 '극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알려주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변화는 왜 이다지도 어려운가'(우리는 우리가 비판하는 것에 여전히 투자한다). '그럼에도 변화는 왜 가능한가'(우리가 움직임에 따라 우리가 투자하는 것도 움직인다).
P371.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몸을 지닌 주체가 애초에 상처를 입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한다. 하나는 고통을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 표면화되는 강렬한 과정 가운데 고통이 이미 해석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고통이 과잉결정된 것임을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며, 더 나아가 고통을 번역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고통은 번역을 통해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며, 이동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고통을 주는 애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애착을 번역하는 행동에 나서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여성의 고통을 페미니즘 정치의 당연한 토대로 삼지 않을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P373. 페미니즘을 페미니즘이 맞서는 것에 윤리적, 정치적, 더 나아가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일로 이해한다면, 페미니즘이 맞서는 것이 페미니즘의 '외부'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맞서는 '것'은 페미니즘 정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분노가 무언가에 '맞서는 일'이라고 할 때, 이는 피해의 역사를 뛰어넘어 순수하고 무해한 자리에 이르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P375. 우리가 [고통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 분노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분노는 고통에 대한 해석을 분명히 수반한다. 분노한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한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대상을 분노의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것도 그렇게 여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무엇 때문에 분노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은 찾아오며, 이 모든 순간에 우리가 언제나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도 않는다.
P377. 페미니즘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일에만 몰두하지 않을 때, '여성' 이나 '젠더' 범주에 갇히지 않을 때, 페미니즘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며' 작동할 수 있다. 정해진 대상을 상실하는 일은 페미니즘 활동이 실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활동이 움직이고 있으며 사회운동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P379. 분노하는 일은 발화 행위와 마찬가지로 상대가 이해해야만 '사그라든다'"(Frye). 프라이의 논의를 따라서 브랜든 실버는 "발화자의 분노"가 이른바 "버르장머리 없는 발화자를 언어적 명령으로 침묵시키려는 수신인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한다. 실버가 주장한 것처럼 발화자의 분노를 발화의 수신인이 받아들이지 않고 되돌리는 경우에는 소통의 단절이 발생하고, 분노를 표현하는 원래의 발화 행위는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발화행위가 기대하는 효과를 일으키지 못한 채 타자에 의해 '완결된다'고 할 수 있다. 상대가 발화자의 조건을 받아들이는 데는 특정한 조건이 필요하며,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는 분노를 표현하는 정치적 주장이 '무의미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발화자가 분노를 표출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무언가에 반대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수신인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도 있다. 여기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와 연구자에게 두 가지 전략적인 질문이 생긴다. 페미니스트의 분노에 대한 정의로운 경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가?
P381. 페미니스트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페미니스트의 분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맞서는' 것이 공동체 밖에 있다고 간주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페미니즘의 이상을 페미니스트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정치적 이상이 물화되면 어떤 페미니스트는 '주인공'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이들은 '주인공'인 자신이 사랑과 인정으로 베푸는 환대를 누가 받을 만한지 판단한다. 결국 공동체에 먼저 소속된 사람과 새로 참여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선은 그대로 남는다(Ahmed). 이러한 정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쩌면 페미니즘이 우리에게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고 생각할 때도 페미니즘에 불편한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 불편한 상태란 우리가 살아가고 일하는 장소에 '푹 잠기지 않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가 투자하는 것에 항상 의문을 지녀야 한다.
P389. 감정은 교육을 통해 기대되는 특정한 '결과'여서는 안 된다. 감정을 결과로 기대할 때, 감정은 은행에 저축하는 돈과 같은 것이 된다. 감정이 페미니스트 교육의 (과정 가운데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결과'로 제시되는 상황에서 페미니스트 교수자가 해야 하는 일은 학습자에게 적합한 감정을 "주입하는" 것이 되고, 결국 "학습자는 '지식을 저축하는' '빈 그릇'이 되고 만다"(Freire). 그렇게 감정은 물신 대상이 되고, 우리는 감정에 이름이 부여되기 전에 이미 그 의미를 단정하게 된다. 하지만 감정이 교육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감정이 특정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P396. 희망이 없다면 미래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고, 몸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하다 보면 마치 미래가 실현되는 일이 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주체의 의지에 지나치게 많은 무게를 둘 때, 희망의 정치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P396. 고집스러운 희망은 이미 상실한 대상에 투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을 미리 없애버릴 수도 있다. "희망은 주로 발전과 변화를 일으키는 정동으로 이해되지만, 희망이 일련의 고착으로 이어질 때 희망은 발전과 변화라는 목표를 실현하지 못하게 된다"(Potamianou). 포타미아누는 희망이라는 감정이 상실한 대상을 대신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희망에 투자하는 일은 주체가 자아 이상에 부응하는 데 실패한 순간에도 자아 이상을 유지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 그렇게 애착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이 되고 만다.
P398. 한편 젠더가 중요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페미니스트 희망이 포스트 페미니즘으로 번역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포스트 페미니즘은 젠더가 아무 의미 없는 세계가 지금 펼쳐졌다고 선언한다. 이는 젠더를 비롯한 어떠한 권력도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공명한다. 하지만 포스트 페미니즘이 그리는 세계는 우리가 희망했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페미니스트의 이름을 내걸고 맞서온 것이 여전히 계속되는 세계일 뿐이다.
P401. 나를 페미니즘으로 이끈 희망은 '내가 맞서는 것'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서 비롯한다. 희망은 내가 지향하는 것이 성취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Pieper). 페미니즘에 희망을 둔다는 것은 미래를 향한 페미니스트 비전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인식한다는 의미다. 페미니즘에 희망을 거는 일은 단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에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다.
P401. '우리는 언제 떠나보내야 하는가?' '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확실한 정답이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할지 항상 새롭게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결정은 내게 속한 것도, 더 나아가 상대에게 속한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결정이 타자 곁에서, 타자를 향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타자에게 영향을 받는 일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향해 페미니즘을 열어두는 일에 핵심을 차지한다.
P413. 나쁜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바꾸는 일이 부정의로 인한 피해를 반드시 회복시키는 것은 아니다. 나쁜 느낌을 좋은 느낌으로 전환하는 일은 느낌과 주체와 대상의 구분을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전환을 통해 바로잡으려고 했던 폭력을 오히려 되풀이하기도 한다. (중략, P414) 우리는 좀처럼 인식되지 않는 사회적 규범으로 인해서 어떠한 폭력은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부정의를 감정으로 환원하는 일은 타자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주장 또한 '정당화한다'.
P420. '행복'이 정의의 '진실성'을 나타낸다고 이해하는 일은 위험하다. 벌랜트는 이 행복의 환상을 "특정한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을 따르는 일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낙관이라고 이야기한다. 어리석은 낙관은 주체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에게 주어진 약속을 통해 발생한다. 행복의 약속은 일반 사회에서 '진실'로 통용된다. 예를 들어 국가가 '행복의 추구'를 국가의 본래 목표로 보장하는 한, 주체는 국가를 '희망'으로 삼는다. 국가가 약속한 '행복'은 주체가투자한 것을 국가가 되돌려주지 못하더라도 투자가 지속되도록 한다. 국가가 훌륭한 시민에게 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하는 '행복'은 언제나 미래로 연기된다. 투자한 것을 되돌려받지 못하는 일은 국가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만든다. 행복의 끝없는 연기는 기다림의 형태로 나타난다. 국가에 대한 투자는 '정의'를 보상으로 약속하지만, 투자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의가 실현되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행복을 통해 정의를 선사할 가능성을 지닌 정의의 '행위자'가 된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정의가 현재 시점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실패를 통해서 지속된다.
P428. 치유는 상처를 덮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드러낸다. 회복한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뜻이다. 부정의에 대한 인정이 가져온 가시성은 평범하고 규범적인 것을 드러내는 가시성이며 진실의 기호 아래 감춰졌던 것을 드러내는 가시성이다.
P428. 정치적 투쟁은 증언을 듣지 않으려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배우고 증언이 가닿을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P428. 정치적 투쟁이 투쟁인 이유는 우리가 맞서는 것이 우리가 가진 자원을 빼앗고,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키며,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시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목숨까지 빼앗기 때문이다. 비록 정의가 더 나은 느낌에 '관한' 것은 아니지만,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느낌을 중요한 문제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나은 느낌은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일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중요하다.
P430. 부정의에 대한 감정적 투쟁은 좋은 느낌이나 나쁜 느낌을 찾아내서 표현하는 일이 아니라 느낌이 우리를 움직이는 과정에 가깝다. 느낌은 우리가 도전하고 싶은 규범과 다른 관계를 맺도록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가 치유하고 싶은 상처와 다른 관계를 맺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 혹은 떠나버리는 데 감정을 '소모하는 것' 이 아니라 움직이고 움직여지는 일과 노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움직이는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할 때, 타자에 대한 다른 형태의 애착이 가능해진다.
P453. 정동적인 속성이 대상에 내재하고 나면 대상은 역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정동이 내재하는 일에 역사를 부여해야 한다.
P458. 나는 감정을 심리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다시 말해서 감정을 내가 가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이 타자의 느낌을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나의 느낌이 나의 것이 아니라면 상대의 느낌도 상대의 것이 아니라는 주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타자의 자리를 없애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타자의 느낌을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타자에 대한 폭력을 반복하는 일이 될 수 있다.
>>> 이해해 (X) 나도 비슷한 경험 있어 (O)
P465. 많은 이들은 행복이 지향점이나 궁극적인 목표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 개념이 지닌 중요성에 대해 다른 방식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어떤 대상이 좋은 것이 되는 이유는 그 대상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수단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에 다다르기 위해서 하거나 소유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대상은 행복을 가리키기 때문에 좋은 것이 된다. (중략, P466) 우리는 이러한 대상을 '행복한 대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행복한 대상이 순환한다고 해서 [행복하다는] 느낌이 반드시 [주체 곁을]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중략, P467) 우리는 우리가 기대했던 행복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에 실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실망감은 한편으로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서사를 수반하기도 한다(왜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준다고 여겨진 대상이 실망의 원인이 될 때는 분노하는 서사를 수반하기도 한다. 이때 분노는 행복의 약속을 어긴 대상을 향할 수도 있고, 대상을 좋은 것이라고 띄워주면서 행복을 약속했던 이들에게 쏟아질 수도 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이방인 혹은 내가 쓰는 표현으로 '정동 소외자affect aliens'가 된다.
P472. "같은 느낌"이란 상대가 느끼는 감정은 공유하지만 느낌의 대상은 공유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상실한 상대를 바라보면서 함께 슬퍼하는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내가 슬픈 이유는 상대가 슬프기 때문이며, 내가 느끼는 슬픔은 상대가 느끼는 슬픔을 향한다. 같은 느낌은 일종의 위기로 경험되기도 한다. 상대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행복을 느끼기는 하지만, 상대를 행복하게 만든 것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는 것이다. 이처럼 위기는 대상이 물질화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P479. 캐머런은 상당히 명시적으로 신념과 인종을 연결한다. "우리는 비난받을 만한 견해를 지닌 사람, 이를테면 인종차별을 옹호하는 사람이 백인일 때는 마땅히 상대가 잘못됐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를 지니고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백인이 아닐 때는 상대에게 단호히 맞서는 것을 솔직히 말해서 너무 조심스러워합니다. 아니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캐머런의 이야기에서 인종차별은 "마땅히" 잘못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발화가 함의하는 메시지는 백인의 인종차별을 비난하려는 경향과 "백인이 아닌 상대"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견해와 행동에 반대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사실은 똑같다는 것이다. 캐머런의 연설은 백인 사회에서 인종차별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인상을 자아내는 한편(이는 인종차별이 일상적인 차원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흐리는 일에 공모한다), '우리'가 타자를 '관용했기' 때문에 타자가 자신이 지닌 신념을 고수하게 됐고 더 관용적이고 너그러운 존재가 되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함의한다. 비백인 타자에게 단호히 맞설 수 없어서 불안에 빠진 백인 주체는 그렇게 국가를 상징하는 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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