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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들:날아들다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 아비지트 배너지, 에스테르 뒤플로 본문
1. 원제는 Poor Economics. 빈곤의 경제학(economics of poverty)이 경제학의 빈곤(poor economics)현상을 보인다는 의미다. 많은 경제학자가 가진 것이 적다는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적 현실에 흥미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번역은 틀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저자는 줄곧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개선하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서술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다(그 반대에 가깝다). 저자의 관점에 맞게 풀어보자면 '가난한 사람들의 선택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일 것이다. 출판사가 '스스로를 고평가하고 싶어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타겟팅했나 싶다.
2. 계급적 사회질서의 직접적인 이득을 챙기는 이들의 가난혐오, 그저 안주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무관심, 거대의제에 절망한 이들의 허무주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내가 ~해도 어차피 남들은 다 ~하니까 소용없다", "~할 바엔 ~ 하겠다"(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실천하지 않음), 이런 주장은 힘이 세지만 분명 거짓이다. 사회는 바뀐다. 다만 거짓임을 명백히 밝히려면 공부해야 한다. Two-Hand Economist(경제학자에게 정책 조언을 구하면 한편으로는 이렇다고 하다가 곧 다른 한편으로는 저렇다고 하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말)처럼 꼼꼼하게 오류를 검토하고,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안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3. 이 책은 자유시장의 힘을 신뢰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자유시장의 수혜를 받을 수 있게 시장을 조정하는 정부와 금융기관의 역할을 강조하고 진취적으로 생각할 것을 촉구한다. 다만 나는 투자와 수익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불신하고(이 책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의 특징이다), 대출의 활성화가 '유동성을 통해 개인의 창의성과 생산성을 시장에 반영하는 방법'보다 '거대자본 증식의 도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며, 투자와 성장의 당위성을 불신하기 때문에(결국 불평등 문제의 핵심은 분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출발선을 위로 올리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결국 축적된 부를 깎아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빈곤에 대해 좀 더 비주류적으로 접근하는 근래의 연구가 궁금하다. 하지만 케인즈적인 접근으로도 세상이 충분히 살 만한 곳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의 말마따나 해결책은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P17. 누군가에게 한 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면 '기부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다. 분명 기부금은 항아리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이 될수 있지만, 한 번 더 생각할 경우 '만약 그 항아리가 밑 빠진 것이라면?'이라는 의문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다시 생각할 것을 권하는 초대장이다. 무엇보다 빈곤 문제와 싸우는 것은 너무 버거운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제대로 확인하고 정확히 이해한다면 빈곤은 단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의 종합일 뿐이다.
P53.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지적했듯 최근에 일어난 기근의 원인은 대부분 절대적인 식량 부족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식량의 부적절한 분배, 즉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주리는데도 다른 한 쪽에서는 식량을 산더미처럼 쌓아놓는 관행을 허용하는 제도적 실패 때문에 일어난다.
P65. 그들은 운명에 맹렬히 맞서기보다 생계 수준을 낮추면서 궁핍한 상황을 견뎌낸다. 그렇다고 사치품을 완전히 배제한 채 필수품에 집중하는 식으로 생계 수준을 낮추는 것은 아니다. (중략) '사치'를 신중하지 못한 사람들의 충동구매로 치부할 수는 없다. 이것은 계산된 행동으로 내적 동기에서 비롯됐든 외적 압박에서 기인한 것이든 강한 의지를 반영한다. 오차 음바르크는 빚을 내서 TV를 산 게 아니라 여러 달 동안 절약해서 구입한 것이다. 인도의 어머니들 역시 10여년 뒤에 치를 딸의 결혼식을 위해 틈틈이 절약한 돈으로 작은 장신구와 스테인리스 냄비 등을 사들인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물건에 투자하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대개 기회 실현과 생활의 근본적인 변화 가능성이다.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다 보면 희생을 감수할 만큼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P99. 공동체 전체를 완전히 보호하자는 것은 만점짜리 목표다. 하지만 '만점짜리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아예 포기하는 게 낫다' 식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P100. 심리학 연구에서는 사람들이 미래를 생각하는 방식과 현재를 생각하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이를 동태적 비일관성time inconsistency이라고 부른다)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감정과 당면 욕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특히 오지 않은 미래보다 눈앞의 상황에 더 충실한 경향이 있다. (중략, P102) 사람은 누구나 사소한 손실을 나중으로 미루는 성향이 있다. 즉 사소한 손실을 현재의 자신보다는 미래의 자신에게 부과하려 한다. (중략) 과태료 부과 혹은 유인 제공은 스스로 바람직하다고 여기면서도 계속해서 나중으로 미루는 특정 행동을 독촉하는 효과가 있다. <넛지Nudge>에는 이러한 행동을 촉발하는 여러 가지 개입 방식이 있다. 핵심은 '디폴트 옵션'이라는 개념이다. 디폴트 옵션이란 개인이 특정 행동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대다수 국민에게 가장 유익한 대안이 자동으로 선택되고, 개인이 특정 행동을 할 경우에는 그 대안을 기피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안을 선택할 자유를 인정받지만, 그 대안 선택에 수반하는 사소한 손실에 부담을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 디폴트 옵션을 선택한다.
P106. 정보 부족과 박약한 신념, 자꾸만 뒤로 미루는 버릇은 가난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부딪치는 문제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좀 더 배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우리는 흔히 자신이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수많은 편의 시설에 둘러싸여 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역니다. 상수도가 설치된 덕분에 아침마다 식수에 염소를 첨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도 없고, 하수는 저절로 흘러나가므로 그것이 어떻게 배출되는지 알 필요도 없다. 또한 우리는 대부분의 의사가 최선을 다해 진료한다고 믿으며 공중 보건은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보건 의료 제도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방접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의료 제도가 알아서 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방접종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프로그램대로 따르고 어쩌다 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아이가 있어도 다른 아이들이 모두 예방접종을 했기 때문에 볼거리에 걸릴 확률은 낮다. 이처럼 우리는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늘 자제력과 결단력에 의존해야 한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완벽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참을성 있고 현명한 사람은 없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넛지에 둘러싸여 있는 덕분에 비교적 쉽게 건강을 챙길 수 있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능한 쉽게 예방의료의 혜택을 누리도록 하고, 의료 행위의 품질을 규제하는 보건 의료 정책을 주요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중략, 108p) 안전하고 완벽한 위생 시설이 갖춰진 집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온정주의의 위험성이나, 개개인에게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등의 훈계를 늘어놓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부자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시스템 속에 완전히 녹아 있어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온정주의의 수혜자가 아닌가. 우리가 개인적인 선택권을 행사해 누릴 수 있는 혜택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리는 것은 모두 온정주의 정책 때문이다.
P179. 가족을 하나로 묶는 것은 완벽한 화합도 아니고 자원과 책임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능력도 아니다. 가족의 결속은 각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에 대해 지켜야 할 책무, 즉 일종의 '계약'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계약은 매우 불완전하고 조악하며 느슨한다. 가족의 결속력을 강화하려면 이 계약에 사회적 강제성이 있어야 한다. 가정 내부적으로 구성원이 협상에서 서로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더라도 사회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도록 하는 것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P197. 빈곤 상태에 놓였을 때와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몸에서 생성되는 코르티솔의 양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가난으로 늘 스트레스를 받는 가정은 체내 코르티솔 분비량이 일반 가정보다 높다. (중략) 코르티솔은 인지 능력과 의사결정 능력에 직접적인 손상을 준다.
P207.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승수효과다. 이율이 높아지면 대출자가 대출금을 상환하지 않을 방안을 찾고자 하는 유인이 커진다. 동시에 대부업자는 대출자를 더욱 신중하게 감시 및 조사해야 하는 탓에 간접비용이 늘어난다. 이는 다시 이율 상승을 부채질하는 한편 대출자에 대한 조사는 강화된다. 결국 대부업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출금이 적어 충분한 수입을 올릴 수 없으므로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P269. 가난한 사람들이 저축을 위해 이용하는 수많은 방법은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저축에 손대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략) 자제심이 부족한 경우 저축을 할 수밖에 없도록 자신을 압박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P271. 많은 사람이 제공받은 계좌를 이용하지 않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인출 수수료가 비쌀 뿐 아니라 계좌에 돈을 묶어두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제심 부족을 극복할 방법을 알고 있더라도 이를 이용하려면 그만한 계기와 동기가 필요하다.
P273. 가난한 사람들이 간절히 갖고 싶어 하는 수많은 물품은 상대적으로 비싼데, 수중에 돈이 없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유혹재의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나는 냉장고를 살 돈을 모을 수 없어. 저축하지 말고 그냥 차나 더 마시자.' (중략) 하지만 저축하지 않으면 그들은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중략) 문제는 자제력이 근육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피로가 심해진다는 점이다. 탓에 가난한 사람일수록 저축을 더 힘겨운 일로 여긴다. 가난한 사람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생활하는데, 이때 분비되는 코르티솔 때문에 더욱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다.
P302. 투자가 적으면 수익이 적어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투자를 많이 할 수 없다(빈곤의 덫 - S자형 딜레마, 현재수익보다 미래기대수익이 더 적음). 하지만 혹 부분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투자를 많이 하면 수익이 늘어나 다시 더 큰 투자를 할 수 있고 또 그만큼 수익도 늘어난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혹을 넘어설 방법이 없다는 데 있다. 적은 돈을 빌릴 곳은 있지만 영세 사업자에게 큰돈을 빌려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소액금융기관 역시 안전한 투자를 선호한다). 더구나 혹을 넘어서러면 관리 능력을 비롯해 여러 가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이런 것이 있을 리 없고 그것은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영세한 사업은 계속 영세할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이따금 초기 투자로 한계수익을 올려도 그것으로 사업을 확장하려 하기보다 다른 일을 병행하는 쪽을 선택한다. 예컨대 아침에는 도사를 팔고 낮에는 옷을 팔며 저녁에는 구슬 목걸이를 만드는 식이다.
P306. 가난한 사람들은 사업에 특별한 열정이 없어도 사업을 선택한다. 그들에게 사업은 취업을 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P321. 정치 제도의 목적은 정치인들이 개인적 이익을 위해 경제를 주무르는 것을 예방하는 데 있다. 안타깝게도 나쁜 제도는 대체로 그것이 영구히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른바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에 따르면 현재의 정치 제도에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경제 제도가 자신들이 부를 쌓는 데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조직하고, 일단 부를 손에 넣으면 이를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일체의 시도를 차단한다.
P343. 부패와 근무 태만은 어느 정부에나 있는 고질적인 문제지만 다음의 세 가지 상황에서 그 위험이 더욱 심화된다. 첫째, 오토바이 운전 중 헬멧 착용, 자녀의 예방접종 등 국민이 번거로워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을 정부가 이행하도록 강제하는 상황이다. 둘째, 사람들이 받게 될 혜택이 그들이 지불해야 할 비용보다 높을 때다. 예컨대 모든 사람에게 무상의료를 제공할 경우, 돈이 많은 사람 중에는 뇌물을 써서라도 대기행렬을 무시하고 먼저 진료를 받으려는 경우가 있다. 셋째, 공무원이 급여는 적은데 업무량은 많고 그들에 대한 감독이 부실하며, 그들이 해직당해도 큰 손해를 보지 않을 때다.
P347.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직무유기를 자행하는 간호사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는 간호사들에게 부과된 근무 규칙 자체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간호사들은 일주일에 엿새를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간호사들은 보건소에 출근해 출근 도장을 찍은 다음 약품 가방을 채역들고 외진 마을을 두루 찾아다닌다. 그늘에 들어가도 기온이 섭씨 38도에 육박하는 무더위에도 5킬로미터씩 걸어 다니기 일쑤다. 또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임산부와 어린이의 건강 상태를 점검하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붙들고 자녀에게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들은 대여섯 시간 동안 돌아다닌 후 다시 걸어서 보건소로 돌아온다. 퇴근 도장을 찍은 뒤에는 두 시간을 버스에 시달려야 겨우 집에 도착한다. 어느 누구도 이런 일을 매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할 거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호사들은 어떻게 그런 일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나름대로 규칙을 세웠다. 간호사들은 우리와의 간담회에서 오전 열 시 이후에나 출근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물론 보건소 바깥벽에는 오전 여덟 시에 문을 연다는 공지가 버젓이 붙어 있었다. 아마도 어느 공무원이 현장의 실정을 정확히 살펴보지도 않은 채 책상머리에서 보건 의료 시스템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며 만든 규정이리라.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무지, 타성이다. 이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마땅한 수많은 노력을 훼손한다.
P353. 원체콘이 2001년 베냉에서 실시한 연구에서는 후견주의적 메시지가 보편적인 이익에 호소하는 메시지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신뢰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인들은 '공익'을 입에 올렸지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권자는 후견주의적 메시지를 더 신뢰했다. 만약 '보편적 이익'에 호소하는 메시지가 좀 더 구체적이고 특정 안건에 집중했다면, 또한 후보가 당선될 경우 유권자가 그에게 책임을 촉구할 수 있는 공약을 내걸었다면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결론 | 가난의 이유를 알면 길이 보인다
어떤 나라는 성장하는데 또 어떤 나라는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확실한 근거를 대는 경제학자(또한 다른 분야의 전문가)는 거의 없다. 이들은 방글라데시나 캄보디아 같은 최빈국의 성장을 작은 기적으로 여기고, 코트디부아르 같은 최빈국 국민을 '밑바닥 10억'으로 분류한다. 어떤 결과가 나온 뒤에 각국이 특정 경제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을 밝혀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나라가 언제 어떻게 경제성장을 이룰지 예측할 수 없고, 또 어떤 일이 갑자기 불길처럼 일어나는 이유도 알지 못한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인력과 지식이 필요하다고 볼 때,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교육받고 영양을 섭취하며 건강을 유지한다면 작은 불꽃이 큰불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의 안정과 더불어 자신감이 생겨 자녀에게 투자하도록 새로운 일을 찾을 수 있게 도와줄 때도 마찬가지다. 당연한 얘기지만 불꽃이 튀기 전까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며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 가난과 좌절을 그대로 방치해 분노와 폭력이 득세하면 불꽃은 영원히 피어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가난해서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효과적인 사회 정책을 펼치면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줄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언젠가 가능한 혹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제성장을 위해 중요한 도약의 발판이 된다. 설령 이러한 판단이 그릇된 것이라 해도(사회 정책이 경제성장과 무관하다고 해도) 성장의 불꽃이 튀기만 넋 놓고 기다리기보다 지금 당장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모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1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빈곤을 완화할 방법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가난 때문에 삶과 재능을 낭비하는 현실을 수수방관해서는 안 된다. 본문에서 말했듯 빈곤을 근절할 마법의 탄환이나 만병통치약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개선할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짚어보자.
첫째, 가난한 사람들은 결정적인 정보가 부족하거나 그릇된 정보를 진실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녀가 예방접종을 받았을 때의 이점을 잘 모른다. 그들은 자녀가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이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비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올바른 사용량은 알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에이즈의 감염 경로와 정치인이 하는 일에 무심하다. 자신의 확신이 그릇된 것으로 밝혀져 최악의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데도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나이든 남성과 성관계를 하는 10대 소녀나(나이든 남성일수록 출산을 선호하고,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제력 있는 나이든 남성과 가정을 꾸리는 게 나을 거란 기대로 피임을 하지 않게 됨) 적정 시비량의 두 배나 되는 비료를 사용하는 농민이(아내의 농지에 뿌릴 비료를 모두 남편의 농지에 투자함. 아내의 농지는 가족용, 남편의 농지는 판매용. 비료가 단순히 다다익선일 것이라고 판단하여 판매용에 모두 투자) 그 대표적인 사례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신반의하는 태도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가령 예방접종의 헤택을 반신반의하는 태도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루는 습관이 결합돼 많은 아이가 예방접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아무런 정보 없이 투표하는 사람들은 같은 인종 출신의 후보자를 선택할 공산이 크지만, 이는 편견과 부패가 증가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간단한 정보 하나가 큰 파급 효과를 낳은 사례를 많이 보았다. 물론 정보 전달이 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정보를 전달할 때는 사람들이 미처 모르고 있던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혼전 성교를 하지 마라' 등의 흔한 훈계는 별 효과가 없다). 그뿐 아니라 정보는 간단하고 흥미를 유발하는 방식(영화, 연극, TV프로그램, 가정통신문)으로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가령 언론매체)이 제공해야 한다. 만약 정부가 오해를 낳을 만한 정보나 혼란을 주는 정보, 그릇된 정보를 제공하면 그 정부는 신뢰 상실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을 한다. 반면 부유한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올바른' 결정을 하는 비율이 높다. 가령 가난한 사람은 집에 상수도가 없어 지방자치단체가 수돗물에 투입하는 염소의 혜택을 보지 못한다. 깨끗한 물이 먹고 싶다면 이들은 직접 물을 소독해야 한다. 주식에서도 영양성분이 강화된 곡물을 구입할 여력이 없어서 자신과 자녀의 영양 섭취에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이들에게는 퇴직금이나 사회보장연금 분담금처럼 자동 축적 혹은 자동 공제되는 저축 방법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를 강제해서라도 어떻게든 저축할 길을 찾아야 한다. 물론 저축이 쉽지는 않다. 당장 돈을 써야 할 데가 많고 예기치 않은 소소한 지출도 상당한데 저축으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먼 미래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차일피일 미루는 버릇도 걸림돌이다. 이들은 부유한 사람보다 생활 형편이 어려운 탓에 무엇 하나 제때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경쟁이 심한 분야에서 영세 사업을 하거나 임시 노동자로 일하며 늘 경쟁업체와 다음 일자리를 신경 쓴다. 따라서 디폴트 옵션의 힘과 주의를 환기시키는 넛지를 이용해 가능한 쉽게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생활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분과 요오드가 강화된 소금을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이다. 입금은 쉽지만 출금은 까다로운 예금계좌를 개발하고 은행이 가난한 사람들의 예금계좌를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을 정부가 보조하는 방법도 있다. 상수관 설치가 어려운 곳에서는 식수원 바로 옆에 염소를 비치해 누구나 쉽게 이용하게 할 수 있다. 그밖에도 가난한 사람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
셋째, 일부 시장은 가난한 사람들을 아예 외면하거나 받아들여도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과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계좌(운이 좋아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면)를 개설해도 예금이자가 거의 없고 대출받을 때는 높은 이자를 부담한다. 예금 규모에 상관없이 이를 관리하는 데 고정비용이 들어간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심각한 건강 문제가 발생하면 생활에 큰 타격을 받지만 이들을 위한 건강보험 시장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상해보험이나 정형화된 기상보험처럼 보험료 지급에 여러 제한 조항이 있는 보험은 가난한 사람들이 원하는 게 아니다.
간혹 기술이나 제도 혁신이 본래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던 곳에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액금융이다. 소액금융은 극빈층까지는 아니지만 수백만에 이르는 가난한 사람에게 적정 이율로 소액대출을 해준다. 앞으로 몇 년 안에 휴대전화 등을 이용한 전자금융과 전자신분증이 가난한 사람들의 예금 및 송금 수수료 부담을 크게 덜어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시장이 필요한데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부가 개입해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시장을 지원하거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정부가 직접 그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상품 및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방식(예컨대 모기장이나 보건소 방문), 심지어 본인에게 유리한 행동을 하는 경우 보상하는 방식을 취해야 할 때도 있다. 일부 전문가는 상품 및 서비스를 무상 제공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지만 비용 편익 분석의 관점에서 이것은 기우일 수 있다. 서비스 이용자에게 들어가는 간접비용을 고려하면 얼마 안 되는 수수료를 받으려 애쓰기보다 아예 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더 저렴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에서 판매하는 상품가격을 시장의 활력을 고려해 적절히 낮출 필요가 있다. 가령 정부가 보험료 보조금 혹은 교육비 상품권을 지급하거나 은행이 야간의 수수료만 받고 모든 사람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예금계좌를 개설해주도록 강제할 수도 있다.
이때 정부는 보조금을 적용한 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적절히 규제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비 상품권은 모든 부모가 자녀에게 적합한 학교를 알 수 있을 때만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방법은 이미 헤택을 누리고 있는 얌체 같은 부모에게 중복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변질될 수 있다.
넷째,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혹은 불행한 역사가 있어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런 나라에서는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이 엉뚱한 사람의 개입으로 훼손되기도 한다. 교사가 엉터리로 수업하거나 아예 수업을 빼먹는 일도 있다. 원자재를 빼돌린 도둑 때문에 부실하게 건설된 도로가 과적화물차로 인해 부서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는 대개 경제 통제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들의 음모라기보다 세부적인 정책 설계 과정의 실수와 사회 곳곳에 만연한 이데올로기, 무지, 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는 간호사에게 보통 사람이 견뎌내기 힘든 과중한 업무를 부과하면서도 업무 규정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댐, 소액금융, 맨발의 의사barefoot doctors(마을 주민을 훈련시켜 그들이 살고 일하는 공동체의 건강을 돌보게 한 제도) 같은 일시적인 유행은 지역 내부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정책으로 채택된다. 언젠가 인도의 한 고위공무원이 마을교육위원회에 우등생 부모와 열등생 부모가 모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3학년 때까지는 시험을 치지 않는데 우등생과 열등생은 누가 정하는 거냐고 묻자 그는 얼른 화제를 바꿔버렸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규칙도 일단 정해놓고 나면 타성적으로 계속 유지된다.
다행스런 일은(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기존의 사회 및 정치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정부 운영 방식과 정책을 개선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좋은' 제도적 환경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고 나쁜 제도적 환경에서도 어느정도 개선의 여지는 있다. 마을 주민총회에 모든 주민 참여시키기, 정부 공무원을 감시하고 직무유기에 대한 책임 묻기, 정치인을 감시하고 그 정보를 유권자에게 공개하기, 공공서비스 사용자에게 서비스 내용(보건소 운영시간, 보조금 액수, 물품의 양 등) 명확히 인식시키기 등으로 사소한 혁명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일은 할 수 없다는 예상은 흔히 자기충족적 예언으로 전환된다. 예를 들어 학생은 교사로부터(혹은 부모로부터) 수업을 따라갈 만큼 똑똑하지 못하다는 암시를 받으면 학업을 단념한다. 과일 노점상은 빚을 갚더라도 곧 다시 빚을 지게 될 거라고 예상하면 빚을 갚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지 않는다. 간호사가 보건소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주민이 한 명도 없으면 간호사는 그것을 구실로 병원을 비운다. 어떤 정치인이 좋은 일을 할 거라고 예상하는 주민이 한 사람도 없으면 그 정치인은 주민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유인을 얻지 못한다.
이런 예상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자기 마을에서 여성 지도자가 활동하는 모습을 본 주민은 여성 정치인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사 자기 딸도 정치인이 되길 바란다. 자신이 할 일은 모든 아이가 글을 읽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교사는 여름방학 캠프나 방과 후 보충수업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친다.
실패가 실패를 낳는다면 성공은 또 다른 성공을 낳는다. 어느 한 상황이 개선을 이루면 그 사실 자체가 신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선순환에 발동을 걸기 위해 필요한 경우 물품(혹은 현금)을 무료로 나눠주는 일을 꺼릴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가지 외에도 우리 앞에는 충분히 알 수 있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함에도 미처 깨우치지 못한 것이 산적해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그것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할 것을 촉구하는 초대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몇 가지 원칙으로 단순화하는 게으르고 정형화된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선택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누구나 실수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상식적으로 보이는 아이디어를 포함해 모든 아이디어를 엄격한 실증적 검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것을 실천하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왜 지금처럼 가난하게 살아가는지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빈곤 문제를 해결할 효과적인 정책 도구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인내심을 발휘해 꼼꼼하게 현실을 이해해야 빈곤의 덫이 어디에 있는지 밝혀낼 수 있다. 더불어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의 덫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우려면 어떤 도구를 주어야 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
거시경제 정책이나 제도 개혁 같은 겉모습에 혹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작은 변화가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케냐에서는 학교에서 2년간 구충제를 지급받아 복용한 아이들이 1년간 구충제를 복용한 아이들(1인당 1년분 구충제 복용비용은 구매력 환산 1.36달러다)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연소득이 20퍼센트 더 많았다. 평생 소득증가분으로 따지면 3,269달러(구매력 환산)다. 물론 구충제 복용이 일반화되면 이 효과는 낮아질 것이다. 구충제를 복용한 아이 덕분에 다른 아이들 역시 회충에 감염될 가능성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케냐가 2006년~2008년에 기록한 1인당 연간 국민소득 증가율 4.5퍼센트와 구충제의 성과를 비교해보라. 우리가 거시경제 정책의 스위치를 눌러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룬다고 해도 평균 소득을 20퍼센트로 끌어올리려면 무려 4년이 걸린다. 더구나 그런 스위치는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에게는 가난의 뿌리를 근절할 스위치가 없다. 이를 인정한다면 우리가 기댈 것은 시간뿐이다. 가난은 수천년 동안 줄곧 우리 곁에 있었다. 50년, 100년을 기다려야 가난의 뿌리를 뽑을 수 있다면 기다릴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우리에게는 실행 가능한 방법이 있다. 당장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허세를 부리지 말고 좋은 의도를 품은 세계 전역의 수백만 명(선출직 공무원, 관료, 교사, 비정부기구 활동가, 학자, 기업가)과 함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무궁무진 개발하자. 그런 아이디어가 99센트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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