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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리처드 로티 본문

감상/책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 리처드 로티

날들 2025. 1. 22. 18:15
(1989)


1.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어렸을 때부터 내겐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면모가 있었다. 내 입맛에 맞지 않는 인생의 형태가 분명 있지만, 그것은 결국 내 입맛에 불과하다는 발상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은 것 같고, 이것도 유용하고 저것도 유용한 것 같아 (특히 진로를 결정할 때)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기독교적(형이상학적)인 가치관을 말해 왔지만 의심과 우연성이 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얼마 전 나는 진로를 선택할 때 이 책에서 말하는 사적-자아창조 요소(공적 요소와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 영향을 끼칠 수 없는)를 최대한 제거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문학과 예술, 철학, 사회학, 우주, 스포츠, 게임 같은 게 내 주요한 사적 흥미지만 지금 나는 공직자를 준비하고 있다. 사적-자율적인 흥미 추구가 수익을 낸다는 발상에 도덕적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생계와 세상에 '필요한' 것을 강하게 연관지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엄격하게 골라냈다. 그러다 가장 최근에는 그냥 사적 흥미 추구할 걸, 싶었는데 그 이유는 저자가 "진보는 사적 강박관념이 역사적 필요에 부합할때 일어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시대가 원할 때, 각종 병폐와 구태를 없애는 영웅이 선택된다. 시대가 원한다면, 나보코프와 오웰이 제 멋대로 휘갈겨도 기막히게 읽어내는 로티가 있듯이 내게 그런 독자가 생길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 시대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공적인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적 흥미를 포기하는 열사 같은 게 아니라, 공적인 물음에 대한 특유의 사적 강박관념에 심취한 인간일 뿐이다. 원한다면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면 된다. 시대의 향방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인정받는 건 내가 결정할 수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와 싸우다 산화했지만 그 어디에도 자취를 남기지 못한 과거의 모래알같은 존재들을 상상해본다.


2. 자유주의와 아이러니즘 사이의 균형? 분열?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비판하고 자율성 추구 속에 내재한 필연적 잔인성을 지적하는 로티의 논리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유려하고 정확하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아이러니즘 사이의 균형을 설명하는 지점만큼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나는 로티가 아이러니즘을 자유주의보다 우선적인 문제로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저자가 자유주의의 핵심이라 말하는 "당신이 고통을 받고 있느냐"는 물음은 아이러니스트에게 굉장히 불안정한 물음이다. 고통의 기준은 어디 있는가? 육체적/심리적으로 구분하든, 개인적/시스템적으로 구분하든 고통이란 무척 주관적인 것이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갈등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명백하게 선한 쪽과 의심의 여지 없이 약한 쪽 사이의 관계로 묘사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객관적'으로는 꽤 풍요롭게 사는 편인 사람들도 각자의 마지막 어휘로 고통과 피해를 호소할 텐데, 그렇게 고통은 서로 경합하며, 저자의 표현처럼 '목소리가 없을' 정도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경합의 그림자 뒤에 가려진다. 아이러니스트에게 '마지막 어휘로 설명된 고통'의 수준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모든 고통과 잔인성에 반대하겠다는 발상은 오만이자 순진함이다. 현실정치는 힘의 논리로 작동하며, 여전히 잔인성이 아닌 지역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부와 가난, 사회적 지위의 문제가 아니다. 비슷한 입지에 놓여 있더라도 국적, 나이,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인에 따라 그 주목도는 상이하다. 미국의 블루칼라들은 트럼프를 당선시키지만, '제 3세계'의 빈민들은 자원으로서 손쉽게 대체되고 소리소문없이 청소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통을 발견하기도, 고통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정말 "당신이 고통을 받고 있느냐"는 물음에 충실한다는 것은 조지 오웰의 말처럼 반드시 어느 한편을 택해야 하는 문제이며, 이 과정에서 어떤 고통은 다른 고통보다 먼저 선택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로티는 '아이러니스트'였기에 고통의 기준을 설정하지 않고자 자유주의의 전선을 "잔인성에 반대하기"라는 소극적 태도로 후퇴시켰다. 로티는 아이러니가 사적인 영역이며 공적 레토릭이 될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잔인성에 반대하기"라는 논리적으로 '깔끔한' 기준을 설정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공적 영역에 아이러니스트다운 욕망을 침투시켰다.


3. 유토피아적 사변의 어두운 전망

왜 로티의 철학에 실용주의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Pragmatism에는 '실용주의'라는 번역에 담기지 않는 의미가 존재한다.) 오히려 실용적인 건 형이상학 같기도 하다. 형이상학은 '최대한'의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관념이다. 형이상학은 질문을 하지 않고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형이상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설정해서 그 해악을 최소화하는 쪽이 더 '실용적'인 게 아닐까? 반면 로티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즘은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사변이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즘이야말로 '절대적' 보편성을 추구할 수 있는 역설적인 방법이겠지만, 인간에게 '절대적 보편성'을 추구할 필요가 있는가? 실현될 가능성은 있는가? 자유주의 아이러니즘은 스스로의 가치조차도 보호할 생각이 없는, 보호하지 않기를 추구하는 유토피아주의다. 로티는 정합성을 위해 자신의 사상을 오웰적인 디스토피아에 무방비 상태로 내어준다. 

그럼에도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즘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방식으로 '도덕적 진보', '더 큰 인간적 연대' 같은 게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모호하다. 아이러니스트에게 세계는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전망은 스스로의 마지막 어휘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왔다고 보인다. 그러나, 현재 세계의 정세는 전혀 그런 긍정적인 전망에 부합하지 않는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의 전염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신념에서는 자신들의 거실 한가운데서 발생하는 테러조차도 직면할 용기와 솔직함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품고 있는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달콤한 향기가 너무 많이 묻어난다! 폭력의 세상에서 비폭력의 길을 걸을 때, 그 길은 고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만 폭력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역사의 안내를 돌아본다면, 비폭력은 폭력을 몰아내는 데 실패할 확률이 높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이 합리적 추론을 통해 폭력을 삼가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성'과 '자유'가 결코 순수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결코 신중하게 판단하고 편견 없이 선택하는 어떤 중립적인 영역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현재의 세계는 다시 극단으로 뭉치고 있다. 성장이란 버블이 사라지며 유토피아적인 희망도 함께 사라졌다.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고, 한국은 계엄으로 분열되었다. 국가와 정치인은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포퓰리즘과 진영논리, 반지성주의로 지식을 통제하며 진보하고 있다고 시민들을 속이는 데 성공한다. 난민, 이민자, 성소수자, 인종, 종교, 젠더, 장애, 빈곤, 세대, 특정 국가에 대한 타자혐오는 극단화를 강화한다. 국가가 '자문화중심주의를 불신할 능력이 있는 시민을 양성'할 유인은 크지 않으며 개방적 태도는 이익이 보장되는 경우에 취사선택된다. 오웰이 환생해 <2034>를 썼다면 찬란한 성공을 거둔 범죄 집단과 결탁한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민주주의"란 레토릭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극단주의의 전통적이고 한결같은 강력함에 아이러니스트의 조심성은 간단히 패배한다. 로티의 말처럼 누가 사회화를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종종 누가 누구를 먼저 죽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로티가 정치를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로티는 인식론에서 정치로의 전환을 말했다. 그럼에도 로티의 전망에 '핍진성'이 부족한 이유는 고통에 대한 인류 공통의 시각을 설정함으로써 잔인함이 실제로 어떻게 일하는지 직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문제는 "잔인함에 반대한다"는 구호다. 잔인성에 반대하는 입장으로서의 자유주의를 진정으로 수호하고 싶다면 이 구호 이상이 필요하다.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차이를 사랑함으로써 타자는 우리를 좋아해야 하고 우리를 닮아야 하는(- 사라 아메드, <감정의 문화정치>)' 다문화주의 국가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손을 더럽히지 않고 잔인함을 은폐하는 자들을 자유주의의 적으로 지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을 '우리'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시도들은 "잔인함에 반대한다"는 단순한 구호 밖에 존재한다.


4. 고통받는 프롤레타리아

나는 "잔인성에 반대하는 것"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생계가 급하고, 권력을 두려워하고, 안락함을 좋아하고, '기꺼이 연대하길 꺼려할 만큼' 고통을 싫어한다. 이는 자유주의나 아이러니즘을 추구하는 엄밀한 지적 욕망에 앞선다. 

미로슬라브 볼프는 <배제와 포용>에서 로티를 직접적으로 비판한다. "아이러니의 입장은 풍요로움에 도취된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적인 자기 이미지를 만들고 신념과 욕망의 망을 다시 짜는" 일에 자기 중심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아, 박해,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착취하고 박해하고 억압하는 이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로티는 자신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즘이 실현되기 위해서 반드시 부르주아적 사회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이미 인지하고 있고, 그래서 그러한 물질적 정신적 수준을 보편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수단을 결여한 주장이자, 목적을 잊은 수단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물질적 정신적 수준을 보편화하느냐'일 텐데 이 책은 이 문제에 대해서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과, 현대의 모든 국가들이 경제성장을 이유로 무언가를 파괴하고 누군가를 낙오시키는 잔인성을 실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은 잔인성에 반대하지만 정작 고통을 '해결'하는 것에는 그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우리"라고 호명되는 이들은 저자와 같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국한되어 있다. 고통받는 사람을 '돕기로 약속하자'에 그치는 연대이자 고통의 당사자는 제외된, 고통받지 않는 사람들간의 연대다. 수준 높은 사람끼리 안전을 재확인하고 안도하는 자위 연대다. 자극적이고 확정적으로 서술한 감이 있지만, 그만한 위험성이 내재된 연대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로티는 "억압받는 자의 목소리"나 "희생자들의 언어"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고통의 부조리함을 강조하기 위함임은 이해하나, 고통받는 이들이 스스로를 대변할 능력은 없다고 단언하며 상상력의 부족이나 정보의 통제와 같은 외부적 인식의 한계에 주목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정교하게 언어화되지 않았을지언정,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목소리가 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한 증언이, 자신이 당했던 억울한 상황에 대한 제한된 인식이 있다. 고통은 이런 증언 없이도 제 3자가 전체에 접근할 수 있는 중립적인 정보가 아니다. 고통은 언제나 주관적이기에, 당사자의 언어를 듣고 당사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파악하는 시도는 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우리" 사회에 보다 시급한 것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의 사상적 안전망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과의 실질적 연대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마태복음 9:12)


P13. 지식인들에게 필요한 대부분의 것은 사적인 것들, 다시 말해서 강자들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약자들에게 필요한 것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는 것들이다. 나는 내가 선호하는 문예비평가인 Harold Bloom이 "자유와 고독을 추구하는 자아는 궁극적으로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위대성과 마주치기 위해 읽는다"라고 말할 때 그의 말에 동의한다.

P22. 역사주의 사상가들의 전략은 사회화, 곧 역사적 여건이 처음이자 끝이라고 고집하는 것, 즉 사회화의 이면이나 역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인간이란 없다고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저술가들은, "인간 존재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물음은, "부유한 20세기 민주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나, "그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과거에 사용된 말들의 단순한 수행자 이상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과 같은 물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해준다.

P24. 이 책은 내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라고 부르는 인물을 스케치할 것이다. 나는 "자유주의"에 대한 정의를 Judith Shklar로부터 빌려왔는데, 그는 자유주의자란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아이러니스트"란 말로써, 자신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과 욕망의 우연성을 직시하는 사람, 그와 같은 핵심적인 신념과 욕망이 시간과 우연을 넘어선 무엇을 가리킨다는 관념을 포기해버릴 만큼 충분히 역사주의자이며 유명론자nominalist인 사람을 지칭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란 괴로움이 장차 감소될 것이며,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에 의해 굴욕을 당하는 일이 멈추게 되리라는 자신의 희망을 그렇듯 근거지울 수 없는 소망 속에 포함시키는 사람이다.

P36. 진리는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다. 즉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문장들이 인간의 정신과 독립적으로 저 바깥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는 저 바깥에 존재하나, 세계에 대한 서술들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서술 활동의 도움을 받지 않는 세계 그 자체는 참이나 거짓일 수 없다. (중략, P40) 참인 것은 바로 언어들이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 그리고 진리란 언어적 단위체 즉 문장의 한 속성이라는 점이다.

P72. 비실존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란 없으며, 다만 어떤 구체적인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이 있을 뿐이다. "죽음"과 "무"란 똑같이 반향되어 돌아오는, 똑같이 공허한 용어들이다. 에피쿠로스는 "내가 존재할 때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이쪽의 빈 것과 저쪽의 빈 것을 맞바꾼다. 왜냐하면 "나"란 낱말이 "죽음"이란 낱말처럼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낱말들의 의미를 해명하려면, 문제의 '나'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채워야 하고,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적시해야 하며, 두려움을 구체화해야 한다.

P76. 블룸은, "지난 3세기 동안 대부분의 시의 은밀한 주제는 영향에 대한 불안, 즉 자신이 행해야 할 어떤 고유한 일도 없다는 것에 대한 시인의 두려움이었다."라고 말한다. ( - Anxiety of Influence)

P80. 시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 - 따라서 니체에게 있어 한 사람의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 - 은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어떤 이의 서술을 수용하는 것이며, 이전에 준비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것이고, 기껏해야 이전에 쓰인 시를 우아하게 변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 원인을 추적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원인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운 언어로 말하는 데 있다. (중략, P82) 니체는 인간의 삶은 실존의 우연성에 대한 전승된 서술을 벗어나서 새로운 서술을 찾아야만 승리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에의 의지와 자기 극복에의 의지 간의 차이이다.

P86. 프로이트는 양심을 "유년기의 (...) 나르시스적인 완전성을 버리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수립해놓은 자아 이상ego ideal"이라고 최초로 서술했다. (중략, P87) 프로이트가 "동정심의 나르시스적 연원"이라 명명한 것을 논의한 다른 구절들은, 연민의 느낌이란 것이 매우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과 매우 구체화된 변천 과정들에 매우 특정한 방식으로 얽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한 친구를 도울 때 어떻게 해서 끝없는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끔찍하게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더 큰 고통을 어떤 방식으로 송두리째 망각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부드러운 어머니이지 동시에 무자비한 강제수용소의 간수가 될 수 있으며, 혹은 공정하고도 절제력 있는 판사이자 차갑게 거절하는 아버지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게 도와준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왜 어떤 경우에는 잔인성을 한탄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그것을 즐기는가를 밝혀준다. 그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범위가 왜 사람이나 물건이나 관념의 매우 특정한 모양과 크기와 색깔에 국한되는지를 보여준다. 또 그는, 익히 알려진 어느 도덕이론에 비춰보더라도 훨씬 더 죄의식이 커야 할 사건들이 아니라, 왜 매우 구체적이며 이론상 사소한 특정 사건들에 우리의 죄의식이 발동하는지를 밝혀준다. 게다가 그는 도덕적 숙고를 위한 각자의 사적 어휘 구축의 장비를 우리들 각자에게 제공해준다. 왜냐하면 희랍인들과 기독교인들에게서 우리가 물려받은 덕목이나 악의 이름들과는 달리, "유년기", "사디즘", "강박증", "편집증" 등의 용어는 그것을 사용하는 각 개인에 따라 매우 구체적이며 매우 상이한 울림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용어들은 철학적 전통이 제공하는 도덕적 어휘보다 훨씬 더 미세하게 직조되고 훨씬 더 개인적인 사례에 맞추어진 우리 자신의 성장, 우리만의 특이한 도덕적 투쟁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의 내러티브를 스케치하게 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도덕적 죄의식과 실천적 경계심 간의 구분을 파괴하도록 도와주며, 그래서 이해타산성과 도덕성의 구분을 흐릿하게 만든다. (중략, P89) 프로이트는 홉스나 흄이 논하듯이 합리성을 추상적이고 단순하며 환원주의적인 방식으로 (플라톤의 이원론을 전도시킨다는 명분 아래 애초의 이원론을 존속시키는 방식으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의식적 전략들이 보여주는 뛰어난 정교함, 미묘함, 재치 등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과학과 시, 천재성과 정신병,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도덕성과 이해타산성을 상이한 정신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적응의 상이한 양태로 보게 해준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어떠한 중심적인 정신능력이란 것도, "이성"이라 불리는 자아의 중심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도록 해준다. (중략, P90) 프로이트는 우리가 개별 행위로 복귀할 필요성이 있다고, 즉 현재의 개별적인 상황과 대안이 과거의 개별적인 행위나 사건과 유사하거나 상이한지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현재 행하고 있는 바, 혹은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를 해석할 때, 가령 그것을 특정한 권위자들에 대해 지난 시절의 우리가 내보이는 반작용reaction이라고 해석하거나, 혹은 유년시절 우리에게 강요된 행동의 묶음이라고 해석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그는 우리가 자아창조에서의 성공, 즉 특이한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특의한 내러티브들 -  말하자면 사례의 역사 - 을 직조하는 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다고 암시했다. 그래서 그는 보편적 기준에 따르지 못한 삶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우리가 비난한다는 암시를 준다. (중략, P91) 즉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속하며 단순히 인간이라는 이유로 우리와 동료 인간들을 결합하게 해주는 그러한 신념이나 욕망은 없다는 것이다. (...) 프로이트를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로 하여금 보편성을 벗어나 구체성을 보게 하며, 필연적 진리나 제거 불가능한 신념을 발견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과거의 특이한 우연성이나 우리의 온갖 행동에 담긴 눈먼 각인을 보게 해주는 그의 능력에 있다.

P95. 프로이트를 니체보다 더 유용하고 신빙성 있게 해주는 것은, 프로이트는 인간성의 거의 대부분을 죽어가는 동물의 처지로 폄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각각의 삶이란 제 나름의 메타포로 맵시를 뽐내려는 시도라고 본다. Philip Rieff의 말처럼, "프로이트는 모든 이에게 창의적인 무의식을 제공함으로써 천재성을 민주화했다."

P98. 시적, 예술적, 철학적, 과학적, 정치적 진보란 사적인 강박관념이 공적인 필요에 딱 들어맞게 된 우연의 일치에서 연유한다.

P100. 프로이트는 도덕철학이 극단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럽다고 묘사한 것들을 우리 자신의 활동과 연속적인 것으로 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점이 중요한 논점인데, 그는 그것을 전통철학의 방식으로, 환원주의의 방식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이 실제로 승화이고, 철학적 체계 구축은 단지 편집증이며, 종교란 단지 엄한 아버지에 대한 혼동된 기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단지 리비도의 에너지가 끊임없이 새 물길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것을 판이하게 다른 무엇과 견주어 "단지" 혹은 "실제로"라고 말하며 실재/현상의 구별을 제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다른 모든 재서술들 옆에 놓일 것들에 대한 또 하나의 재서술, 또 하나의 어휘, 그가 생각하기에 쓰임새가 있고 그 결과 문자화될 가능성이 있는 또 하나의 메타포를 제공하고자 할 뿐이다.

P103. 비인간적인 것, 비언어적인 것 - 맹목적이고 불명료하게 우리를 으스러뜨리는 말없는 절망과 강렬한 심적 고통 - 과 대면하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전유하거나 변용하기를 통해 우연성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없으며, 단지 우연성과 고통을 인지할 능력을 가질 따름이다.

P104. 우리가 스스로를 변함없는 전체로 보려는 철학적 이념을 벗어던지고, 그 대신에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용어로 보려는 이념, 즉 과거를 가리켜 "내가 그렇게 하고자 했던 바"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되찾으려는 이념으로 대체시킨다고 할지라도, 항상 그러한 소망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프로젝트, 완성하기에는 인생이 충분히 길지 못할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점은 진실로 남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대담한 시인의 두려움은 곧 미완성에 대한 두려움인데, 이것은 세계와 과거를 재서술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또 각자의 특이한 메타포를 부과함으로써 자아창조를 하려는 어떠한 프로젝트도, 주변적이며 기생적이라는 점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메타포들은 낡은 낱말들을 낯선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용법은 이미 친숙한 방식으로 사용 중인 다른 낡은 낱말들을 배경으로 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전적으로 메타포"인 언어는 아무런 쓰임새가 없는 언어일 것이며, 따라서 언어가 아니라 단지 웅얼거림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언어란 표사이나 표현의 매개물이 아니라고 우리가 동의한다고 해도, 언어는 의사소통의 매개물, 사회적 교섭의 도구, 한 사람을 다른 인간 존재와 묶어주는 방식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P105) 심지어 가장 대담한 시인이라도 선행자들에게 기생적이며, 자신의 작은 일부만을 탄생시킬 수 있듯이, 그는 미래의 모든 낯선 이들이 베푸는 친절에 의존적이라는 점을 블룸은 상기시켜준다.

P107. 나는 라킨이 제시했던 유한성의 비애감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그것을 철학이 성취하길 원했던 바 - 특이성 없고, 초시간적이며, 보편적인 무엇 - 를 이루지 못한 실패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점에서 사람은 다른 삶을 살아가며 다른 시를 써갈 사람들의 선의를 신뢰해야 한다는 깨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중략, P108) 만일 니체의 전도된 플라톤주의를 피한다면, 바꿔 말해서 관조의 삶에 대해 플라톤이 그렇게 생각했듯이 자아창조의 삶이 완성될 수 있으며 자율적일 수 있다는 니체의 제안을 피한다면, 우리는 각 개인의 삶이 언제나 미완성이지만 때로 영웅적이며 다시 짜여가는 그러한 그물망이라는 생각에 만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자신이 복사물이나 복제품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해내려는 대담한 시인의 의식적인 갈망을 단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무의식적 갈망의 특별한 형태에 불과한 것으로 볼 것이다. 우연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눈먼 각인과 타협하려는 갈망, 비록 주변적일지라도 자신의 용어로 그 각인을 재서술함으로써 스스로 자아를 만들려는 그러한 갈망 말이다.

P117. 한 사람의 자기 이미지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모든 신념이 그렇듯 중심적인 까닭은 그 신념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멀리 하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규준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정당화되는 확신은 전혀 흥미롭지 않다.

P125. 개방적 태도는 그 자체를 위해 육성되어야 한다. 자유주의 사회란 자유롭고도 개방된 만남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참"이라고 부르는 데 만족하는 사회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주의 사회에 "철학적 정초"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그릇된 기여를 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초를 제공하려는 노력은, 낡은 어휘와 새로운 어휘 간의 만남보다 선행하며 그 만남에서 얻게 되는 결과보다 우선시되는, 주제와 논변에서의 어떤 자연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P129. 우리는 "자유가 사회 조직 방식의 주요한 목표라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와 같은 물음을 싹 무시해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중략, P130) 나의 논점은 그러한 문제에 대한 의심을 침묵시킬 실천적인 방도란 없다는 것뿐이다. 그러한 물음을 캐묻는 사람들은 도덕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라면 결코 아무도 가질 것 같지 않은 인식론적 입장을 추구하고 있다.

P139. 우리가 도덕성과 이해타산성 간의 구분을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호소와 조건적인 것에 대한 호소 간의 차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에 대한 호소와 아마도 갈등을 일으키는 사적인 이익에 대한 호소 간의 차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구분을 지켜갈 수 있다. (중략, P140) 셀라스는 "부도덕한 행위"의 핵심 의미는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이 설명에 의하면 부도덕한 행위란  만일 그런 행위가 저질러진다면 오직 짐승들에 의해서나 혹은 다른 가문, 종족, 문화, 시대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저질러질 그런 종류의 행위이다. (...) 셀라스의 설명에 의하면 도덕철학은 "무슨 규칙들이 나의 행위를 지배하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누구이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우리에 이르게 되었으며,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의 형태를 취한다. 달리 말해서 도덕철학은 일반적 원칙을 추구하는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서사와 유토피아적 사변의 형태를 취한다. 

P146. 하버마스, 듀이, 벌린 등이 펼쳐 보이는 그러한 시도들 - 민주적인 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에 호응하는 철학을 수립하려는 시도들 - 에 대한 푸코의 응답은 그러한 사회의 결점, 즉 민주사회가 자아창조나 사적인 프로젝트를 위한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 푸코는 근대 자유주의 사회에 의해 형성된 자아들이 그 이전의 사회들에 의해 창조된 자아들보다 더 낫다는 점을 인정할 태세가 되어 있지 않다. 푸코 저술의 가장 귀중한 부분들은 자유주의 사회에 특징적인 문화 변용의 패턴들이 더 오래된 전근대 사회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일종의 속박이 되어 어떻게 그 성원들에게 강요되는가를 밝히는 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니체가 "노예 도덕"의 원한감정이 고통의 감소에 의해 보상되리라고 보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푸코는 이러한 속박이 고통의 감소에 의해 보상되리라고 보지 않는다.

P149. 푸코는 "억압받는 자들의 언어"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기를 확실히 꺼려한다. 이따금씩 그는 자신이 정신병자들을 "위해서" 말하고 있다거나, 혹은 자신의 저술이 "기능주의와 시스템 이론의 범위 내에 존재하지만 숨겨져 있는 역사적 지식의 덩어리들, 예속된 지식들"을 드러낸다고 암시한다. 푸코의 많은 구절들은 Bernard Yack가 "총체적 혁명에 대한 동경"이자 "우리의 자율성이 제도들 속에 구현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부른 것을 예시하고 있다. 내 생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에게 사적인 삶의 영역으로 남겨져야 할 부분이 바로 그와 같은 종류의 동경이다. 자율성은 사회제도 속에서는 영영 구현될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자율성이란 모든 인간 존재의 내면에 내장되어 있으며, 사회가 인간들에 대한 억압을 중지하면 방출될 수 있는 그러한 무엇이 아니다. 자율성이란 특정의 구체적인 인간들이 자아창조를 통해 얻고자 희망하는 것이요, 오로지 소수만이 실제로 얻게 되는 무엇이다. 자율적이고자 하는 욕구는 잔인성과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자유주의자의 욕구와는 무관한 것이다. (중략, P150) 잔인성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을 유도할 정치적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진정성과 순수성을 향한 니체-사르트르-푸코적 시도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라. 
 
P152. 하버마스는 세계현시가 항상 세계내적인 관행을 배경으로 그 "보편타당성"이 검사되기를 원한다. 그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자극적이며 낭만적인 현시들에 의해 전복될 수 없는 "전문가 문화"의 테두리 내에서만 수행되는 논증적 관행들이 거기에 있기를 원한다. 하버마스는 푸코가 두려워하는 것 즉 "전문가 문화"가 "생명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제도들 속에 반영된 그들 자신의 자율성을 보기를 원하는 푸코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이미 확립된 제도들이 "낭만적" 방식으로 전복되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두려움에 대한 하버마스의 응답은 동일하다. 그는 만일 공적인 제도와 정책상의 변화를 결정하는 일이 "지배 없는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양측에서 오는 위험을 모두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P155. 나의 견해에서는 이성과 그 밖의 것 (예컨대 정념, 니체의 힘에의 의지, 하이데거의 '존재') 사이에 있다고 추정되는 대립이란, "이성"이 치료하며 조화시키고 통일시키는 힘이라는 관념 즉 인류 연대성의 근원을 가리킨다는 관념을 우리가 포기할 때 폐기될 수 있는 대립이다. 만일 그와 같은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관 중심의 이성"이라는 관념을 대체할 "의사소통적 이성"이란 관념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대체시킬 철학적 설명을, 즉 과거 한때 신에 의해 행해진 치료하며 통일시키는 일을 수행해줄 어떤 힘에 대한 철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중략, P156) 인식론에서 정치로의 전환 - "이성"과 실재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서 인간의 탐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정치적 자유가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설명으로의 전환 - 이 그것이다.

P164. 나는 "아이러니스트"를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으로 정의할 것이다. (1) 그는 자신이 현재 사용하는 마지막 어휘 (행위와 신념, 인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채용하는 낱말들. 의심이 주어진다면 낱말들의 사용자는 의존할 수 있는 비순환적인 논변을 가질 수 없고 어찌할 수 없는 수동성 혹은 힘에의 호소만 있을 따름) 에 대해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의심을 갖는다. (2) 그는 자신의 현재 어휘로 구성된 논변은 이와 같은 의심을 떠맡을 수도 해소할 수도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3) 자신의 상황에 대해 철학함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어휘가 다른 어휘들보다 실재에 더 가깝다고, 달리 말해서 자신의 어휘가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힘과 접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P165. 아이러니의 반대는 상식이다. 상식이야말로 중요한 모든 것을 아무런 자의식도 없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습관화된 마지막 어휘로 서술하는 사람들의 표어이기 때문이다.

P176. 아이러니스트들에게는 또 다른 마지막 어휘 이외에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어휘에 대한 비평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재-재-재서술을 제외하곤 재서술에 답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어휘들을 넘어선 어떤 것도 어휘들 사이에서 선택의 규준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비평이란 이러한 그림을 바라보는 것이며 따라서 그림과 실물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 우리 자신들이 설정한 인물이나 우리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의심은 오로지 우리의 교제 범위acquaintance를 확대하는 일을 통해서만 해소되거나 완화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책을 읽는 것이며, 그래서 아이러니스트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자리매김하기보다는 책들을 자리매김하는데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이러니스트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이웃 사람들만 알게 됨으로써 자신을 길러온 어휘에 고착되는 일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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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83. 자유주의 정치에서 관건이 되는 모든 것은, 자유로운 토론의 결과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을 "참" 혹은 "선"이라고 부를 것이라는 널리 공유된 확신뿐이다. 바꿔 말해서 우리가 정치적 자유를 돌본다면, 진리와 선은 스스로를 돌볼 것이라는 확신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토론"이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언론, 사법, 선거, 대학 등이 자유로우며, 사회적 유동성이 빈번하고 신속하며, 문자 해독이 보편화되고, 고급 교육이 공통적이며, 평화와 부가 위로 하여금 다양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들이 말한 바를 생각하는 데 필요한 여가를 가능하게 해줄 때 진행되는 종류의 토론이다.

P184. 부르주아 자유주의 사회제도와 같은 보호가 없다면, 사람들이 사적인 구제를 쟁취하고, 사적인 자기 이미지를 창조하며, 우연히 마주치는 새로운 사람들과 책들에 비추어 자신의 신념과 욕망의 그물망을 다시 직조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와 같은 이상적인 사회에서 공적인 쟁점에 대한 토론은 다음 두 가지 문제를 놓고 전개될 것이다. (1) 평화, 부, 자유라는 목표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할 것이 요구되는 상황에 이를 경우,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 (2) 어떻게 하면 자아창조를 위한 기회를 평등하게 하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기회를 활용하거나 방치하게 내버려둘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회적 접착제의 모든 것이라는 제안은 두 가지 주된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첫째는 실천적인 문제로서, 이 접착제는 결코 충분히 두텁지 못하다는 반론, 즉 민주사회의 공적인 삶에 대한 형이상학적 레토릭은 자유로운 제도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반론이다. 둘째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반론, 즉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가장 나쁜 짓"이라고 보는 사람이 그와 동시에 모든 인간 존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바에 관해서는 아무런 형이상학적 신념도 보유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이다. (중략, P186) 종교적 신앙이 퇴조한 것 그리고 특히 사후의 보상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능력이 퇴조한 것은 자유주의 사회들을 약화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사회들을 강화시켰다. (...) 미래의 보상을 위해 고통을 감내하려는 열망은 개인적 보상에서 사회적 보상으로, 천국에 대한 희망에서 후손에 대한 희망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 과학적 혹은 철학적 의견의 어떠한 변경이 근대 자유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사회적 희망 - 단지 우리의 후손뿐 아니라 모든 이의 후손을 위해 삶이 결국 더 자유롭고, 덜 잔인하며, 더 여가가 많고, 재화와 경험이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희망 - 을 손상시킬 수 있을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P190. 나는 공적인 레토릭이 아이러니스트적인 문화가 가능하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자신의 사회화 과정에 대해 끊임없이 의구심을 갖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청년들을 사회화하는 문화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아이러니는 본래 사적인 문제로 보인다.

P192. 우리는 오웰이 필요료 했던 종류의 것, 예컨대 탄광의 밑바닥에 더 많은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 혹은 당이 프롤레타리아의 배후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아이러니즘과 자유주의의 연계성은 매우 느슨하고, 형이상학과 자유주의의 연계성은 상당히 단단하다는 이러한 느낌이야말로 사람들이 철학에서의 아이러니즘과 문학에서의 심미주의를 "엘리트주의"로 여겨 불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P193. 아이러니즘은 재서술의 힘을 인식한 결과로 도출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서술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용어로, 즉 자신의 현재 모습 그대로 그리고 자신이 말하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아이러니스트는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이 말하고 있는 언어는 자신이나 동료 아이러니스트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주장에는 잠재적으로 매우 잔인한 무엇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지속되는 고통을 야기하는 최선의 방식은 그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을 시시하고 진부하며 무력하게 만들어버림으로써 굴욕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P195) 그러나 형이상학자도 재서술을 한다. 단지 상상력의 이름이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재서술을 행할 뿐이다. 재서술이란 아이러니스트의 특별한 징표가 아니라 지식인의 태생적인 특성이다. 그런데 왜 아이러니스트들은 특별한 분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우리는 형이상학자가 전형적으로 논증에 의해 자신의 재서술을 지탱한다는 사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 자신의 재서술을 지지하기 위해 논증을 제시한다는 것은 청중에게 당신은 새로 프로그램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계발되고 있다고, 즉 '진리'는 이미 당신 안에 있었으며 단지 환한 곳으로 끌어내올 필요만 있었다고 말해주는 것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청자의 진정한 자아, 혹은 화자와 청자가 공유하는 공통된 공적 세계의 진정한 본성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제시되는 재서술은, 재서술되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의 힘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얻고 있음을 암시해준다. 이 암시는, 청자가 갖고 있는 예전의 그릇된 자기서술이 그에게 부과되었던 것이라는 또 다른 암시와 결합한다면, 한층 더 고취된다. (중략, P196) 요컨대 형이상학자는 재서술과 권력 간에 모종의 연계성이 있으며, 올바른 재서술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스트는 그와 유사한 어떠한 보증도 제공하지 않는다. 자유의 기회는 단지 이따금씩만 우리의 자기 재서술에 의해 영향을 받는 역사적 우연성에 달려 있다고 아이러니스트는 말해야 한다. (...) 그러므로 나는 아이러니스트가 비난받는 까닭은 굴욕을 주는 성향 때문이 아니라 힘을 부여해 줄 수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아이러니스트가 자유주의자가 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자유주의 형이상학자가 간혹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미에서의 "진보적"이고 "역동적"인 자유주의자는 될 수 없다.

P199) 아이러니스트의 개념에 의하면 인류의 연대는 공통의 진리나 공통의 목표를 공유하는 문제가 아니라 공통의 이기적인 희망, 즉 자신의 세계 - 그것을 둘러싸고 자신의 마지막 어휘를 직조해가는 사소한 것들의 세계 - 가 파괴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공유하는 문제이다. 

P199. 자신의 환상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환상에도 적극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해주는 어떤 낱말들을 충분히 중첩되게 누구나 갖고 있다면, 각자의 마지막 어휘가 달라도 공적인 목적을 이루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 그러나 그러한 반성은 고통을 보살펴야 할 이유를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유의 발견이 아니라 고통이 발생할 때 반드시 그 고통에 주목하도록 하는 일이다. 그의 희망은 전혀 다른 마지막 어휘를 가진 누군가에게 굴욕을 줄 가능성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마지막 어휘로 인해 제한받지 않는 것이다.

P202. 고통은 비언어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 존재들이 우리를 언어 사용자가 아닌 짐승들과 한데 묶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잔인성의 희생자들, 즉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언어라고 할 만할 것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바로 "억압받는 자의 목소리"나 "희생자들의 언어"와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희생자들이 한때 사용했던 언어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며, 그들은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낼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많은 고초를 겪고 있다. 그래서 희생자들의 상황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그들을 위하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져야 할 몫이다. 자유주의 소설가, 시인, 혹은 저널리스트는 그런 일을 잘한다. 반면에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통상 그렇지 못하다.

P219. 프루스트가 원한 것은 권력의 유한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 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는 단지 그가 만난 사람들에 의해 제공된 그 자신에 대한 서술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자 했을 뿐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찍힌 사진틀 안에 동결된 채 있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타자의 눈에 의해 사물로 변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중략, P221) 그는 권위있는 인물들이 "진정으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파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그리고 그들과 대비되는 다른 권위 있는 인물들이 제공한 용어로 그들이 재서술될 경우 어떻게 보이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권위 있는 인물들을 유한한 존재로 만들었다. 이 모든 유한화의 결과는 프루스트로 하여금 자신의 유한성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그는 우연성을 인정함으로써 우연성을 정복했으며, 그래서 그가 직면한 우연성이 단순한 우연성 이상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스스로 벗어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그의 판단자에서 고통받는 동료로 돌려놓았으며, 그래서 그 자신을 판단하는 데 사용할 취미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P232. 현존재가 유죄라고 말하는 것은 현존재의 마지막 어휘가 사람들에 의해 우연하게 말해지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그런 언어 속에 던져져 있으며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성장해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 프루스트, 하이데거와 같은 특별한 재능과 야망을 겸비한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낀다. 따라서 "하이데거가 '현존재'라는 말로 의미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간단한 대답은 "하이데거 자신과 같은 사람들", 즉 자신이 자기 자신의 창조물이 아니라는 생각을 참아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블레이크가 "나는 하나의 체계를 창조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다른 인간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과 절규했을 때, 그 요점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사람들이다.

P247. 하이데거는 내러티브보다는 호칭 기도litany (성모 마리아, 예언자, 순교자 등 여러 성인의 이름을 부르며 하는 기도]를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아이러니에서 형이상학으로 다시 퇴행한, 즉 힘에 대한 자신의 욕망에 끝내 굴복해버린 니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 그의 최종적인 결론에 의하면,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 - 예를 들어 "서양의 존재론'이나 우리 자신 - 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내맡김Gelassenheit을 위해서, 힘을 추구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위해서, 극복을 희망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위해서이다.

P252.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어휘 내부에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열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수해야 한다. 아이러니스트는 자신의 마지막 어휘에 관한 의심의 해소가 다른 사람들을 고통과 모욕에서 구하려는 시도와는 특별한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시되는 사소한 것들을 총괄하고 재서술하는 것은 "유럽"이나 "역사"와 같이 우리 자신보다 큰 어떤 것을 이해하는 데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아창조와 정치를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특히 우리가 자유주의자라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P259. 내가 배제시키고자 하는 것은 비명제적으로(시적으로, 세계현시적으로) 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근원적인 어떤 것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이것은 비명제적인 것에 대한 논증적 호소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데리다, 데이비슨, 블룸 등은 시인을 존재의 선물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령인이 아니라 그 자신을 근원으로 만드는(ursprünglich) 사람으로 생각하게끔 함으로써, 우리가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서는 "본래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 사태 자체에 의해 장악되며, 사태 자체를 따르고, 자신 속에서 사태 자체가 말로 나타나도록 한다." 더 큰 타자와 연합하려는 이런 소망은 데리다가 하이데거에게서 가장 불신하고 있는 점이며, 이 점에서 나는 데리다가 옳다고 생각한다.

P261. 전기 데리다에 대한 후기 데리다의 우위는, 후기 데리다는 낱말 마술에 대한 의존을 멈추고 그 대신 글쓰기 방식에, 즉 신조어를 발명하기보다는 스타일을 창조하는 데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P263) 후기 데리다는 그의 철학적 사유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러니즘과 이론화 -자신의 선행자들을 일관되고 전체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 사이의 긴장을 무너뜨렸다. 이런 환상에는 아무런 교훈도 없고, 그런 환상으로 이루어진 것은 공적인 (교육적인 혹은 정치적인) 영역에서 전혀 쓸모가 없다. (중략, P265) 데리다는 "단순한 것의 찬란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얽혀 있는 것의 미끄러짐에 관심이 있다. (중략, P283) 그는 점점 더 플라톤이나 하이데거의 이론이 아닌, 사람 그 자체와 관계하고 있다.

P295. 도덕적-미적 구분의 대중성에서 연유하는 불행한 결과 중 하나는 자율성의 추구를 휴식이나 쾌락의 욕구와 혼동하는 것이다. 이런 혼동은 아이러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채택한 마지막 어휘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쉽게 일어난다. 이런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정식화된 목적에 대한 수단을 제공하지 않는 책들은 비도덕적이거나 쓸데없거나, 그렇지 않다면 단지 사적인 기획에 적합할 뿐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유일한 사적 기획은 쾌락의 추구뿐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런 쾌락을 제공하는 책은 진지한 철학책일 수가 없고,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 (...) 아이러니에 대한 이런 몰이해 때문에, (...) 우리에게 사회적 불의를 경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성 추구 속에 내재해 있는 잔인성에 대한 경향을 경고함으로써 잔인성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의 가치를 자유주의 형이상학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쉽지 않다.

P298. "당신은 당신을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질병에 대해 순수한 미적 관심을 가질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목을 베려는 사람에 대해 냉정한 태도를 취할 수 없다. 파시즘과 사회주의가 투쟁을 벌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어느 한편을 택해야 한다. (...) 문학과 심지어 시조차도 팸플릿제작과 뒤섞여버린 지난 10여 년은 문예비평에 큰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순수 심미주의의 환상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 George Orwell, <The Frontiers of Art and Propaganda>

P311. 우리가 상식이라고 부르는 폭넓게 받아들여진 진리의 묶음은 하이데거와 나보코프가 생각하듯이 죽은 메타포를 모아놓은 것이다. (...) 메타포의 신선함이 닳아 없어지면, 진부하고 문자적이며 투명한 언어만이 남는다. 이런 언어는 특정한 사람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명석 판명한 관념들인 "상식"이나 "이성" 혹은 "직관"에 속하게 된다. 당신의 메타포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되고 문자화된다면, 당신은 추상적으로 명예를 얻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잊혀질 것이다. 당신은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를 그치고 단지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작품이 순수한 전율을 만들어낸다면, 당신은 하나의 이름 이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P313. 그는 이성적 직관 능력nous보다는 상상력eikasia이 도덕적 지식의 능력이 되도록 플라톤의 선분을 전도시키고 있다. 나보코프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좋음에 대한 관념을 이런 관념을 그의 재능을 공유하는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감과 결합시키고 있다. (중략, P314) "인간의 선함goodness에 대한 이런 비합리적 신념은 (...) 관념론 철학의 줏대 없는 기초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 된다. 이는 선함이 자신의 세계에서 중심적이고 구체적인 일부가 된다는 뜻이다. 얼핏 보기에 이 세계는 신문 편집자나 다른 잘난 체하는 비관주의자들이 그려내는 현대 세계와 동일시하기 어려운 세계로 보인다. 이들은 경찰국가나 공산주의라고 불리는 것이 전 세계를 공포와 어리석음이 가득 찬,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5백만 평방마일의 장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는 그러한 때에, 선의 우월성에 대해 갈채를 보낸다는 것은 좋게 말해도 비논리적인 소리라고 말할 것이다. (...) 그러나 내가 영혼의 고향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틀림없이 비논리적이기 짝이 없는 이 세계 속에서, 전쟁의 신은 현실적이지가 않다. 그 이유는 전쟁의 신이 독서용 램프와 만년필이 있는 현실로부터 형편 좋게도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라, 평화롭게 존재하는 사랑스럽고 애정 있는 세계를 침범할지도 모를 그런 전쟁 상황을 내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나와 같은 몽상가들, 지상을 배회하는 수천 명의 몽상가들이 신체적 위험, 고통, 먼지, 죽음으로 점철될 가장 암울하고 혼란스러운 기간 동안에도 나와 같은 비합리적이며 신성한 기준을 따르고 있다고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위에 인용한 두 구절이 매우 중요한 심리적 논점을 서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매우 개성적인 기억들로 이루어진 매우 특정한 연상의 사슬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이타주의와 기쁨을 결합시킬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 영웅적인 행위나 화려한 연설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이라는 점이다.

P323. 나보코프의 말을 빌리면, 험버트는 "그럭저럭 '감동을 주는' 듯이 보이는 시시하고 잔인한 철면피"이다. 킨보트와 험버트는 자신들의 강박관념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표현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섬세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관심incurious하다. (...) 나보코프는 예술을 "호기심, 부드러움, 친절한, 황홀경"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라고 보았다. "호기심"이 제일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내 생각에 나보코프는 임시방편적이고 미심쩍은 도덕철학을 이런 삽입구 안에 집어넣으려 하고 있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불멸성을 그가 "심미적 기쁨"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다른 존재 상태"라는 구절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 만일 호기심과 부드러움이 예술가의 표지라면, 만일 이런 것들을 황홀경에서 떼어낼 수 없다면, 그래서 이런 것들이 없는 곳에서는 어떤 심미적 기쁨도 느낄 수 없다면, 결국 심미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 사이에는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P325) 그러나 그는 작가가 고통에 주목하지 못하고서도, 즉 그들에게 소재를 제공해주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무관심하면서도 황홀경을 획득하고 산출해낼 수 있다는 달갑지 않은 사실에 직면해야만 했다. (중략, P327) 그는 자율적인 예술가의 우연적이며 선택적인 호기심과,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인간의 규범이 되는 세계를 창조한다는 정치적 기획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알고 있다.

P340. 문학 언어가 언제나 일상 언어, 특히 일상적인 도덕 언어에 기생한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학적 관심은 언제나 도덕적 관심에 기생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독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안을 하지 않고서는 기억할 만한 주인공을 창조해낼 수 없을 것이다. 

P346. 오웰은 우리 세기를 다음과 같은 시기로 생각했다. "인간 평등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으며", 그와 동시에, "수백년 동안 폐기되었던 몇 가지 일들, 즉 재판 없는 투옥, 전쟁 포로를 노예로 부리는 일, 공개 처형,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문, 인질의 이용, 전 주민의 강제 이동 등이 다시 예삿일로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교양 있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까지 묵인되고 옹호되기도 했다." (중략, P348) 오웰은 독자로 하여금 특정 집단에 의해서 유포되는 잔인성에 대한 구실을 알아차리게 했다. 여기서 말하는 구실이란 찬란한 성공을 거둔 범죄 집단과 결탁한 지식인들이 사용하는 "인간 평등"이란 레토릭이다.

P354. <동물농장>에서 사용된 오웰의 교묘한 방법은 어린아이에게 걸맞은 용어로 자신이 속한 세기의 정치적 역사를 다시 이야기함으로써 좌파 정치 논의의 매우 복합적이고 복잡한 성격을 입체적이고 해학적인 것으로 바꾸어놓는 것이었다. 이런 기교는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스탈린과 히틀러의 중요한 차이를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사회주의", "자본주의", "파시즘"과 같은 용어를 이용해 최근의 정치적 역사를 지속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실행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의 말을 빌리자면, 무수히 많은 주전원을 추가할 것을 요구하는 변칙 사례가 천동설에 너무 많이 축적되었기에, 과도하게 확장된 구조의 오점을 정확히 골라내고 시의적절한 순간에 시의적절한 비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동물농장>이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실재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최근의 사건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대안적 서술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전략적으로 배치된 지렛대였지, 거울이 아니었다.

P358. 오웰은 마치 우리가 태풍이나 사나운 코끼리에 대해 경고하듯이, 오브라이언에 대해 우리가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 그를 발명한 것이다. (...) 그는 오브라이언이 잘못된 이론에 의해 미쳤다거나 그릇된 길에 들어섰다거나 타락했다고 보지 않으며, 도덕적 사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는 오브라이언을 단순히 위험하고 가능한 인물로 볼 뿐이다. (중략, P359) 오웰은 1944년에 쓴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자비한 독재 정부 아래에서 내면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오류이다. 인간이 자율적 개인이라고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최대의 오류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각은 전적으로 당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자, 작가, 예술가, 심지어 과학자조차도 격려와 지지자를 필요로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자극받을 필요가 있다. 표현의 자유를 제거하면, 창조적 능력은 고갈된다." 이 구절은 내가 앞서 인용한 윈스턴의 일기 중 한 대목, 즉 "자유란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이다. 만일 이런 자유가 허용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이에 따라올 것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구절과 어떻게 맞물려 있을까? (...) 관건은 당신에게 참인 것으로 보이는 것에 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 그것이 실제로 참이냐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지막 어휘에 대해서 충분히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한다면,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의 마지막 어휘에 대해서 충분히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도덕적 실재를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을지, 혹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눈이 멀지 않을지, 혹은 "상대주의적으로" 허약해지지 않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P360. 이것은 도덕적 준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심층적인 내면이나 공통적인 인간 본성, 내장된 인간 연대성 같은 것은 없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에게 사회화되어 있는 것, 즉 언어 사용 능력과 이를 통해 신념과 욕망을 서로 교환하는 능력을 제거하면 사람들에게는 어떤 도덕적 준거점도 남지 않는다. 오웰은 "계급 구분을 철폐한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일부를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만일 그가 "계급의 틀 밖으로 나가면" 그는 "같은 사람으로 인식되기가 어렵다"고 덧붙임으로써 이 점을 강조했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특정한 언어로 말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네안데르탈인, 고대 중국인, 이튼 사람, 서머힐 사람, 진리부 사람으로 사회화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은 역사적 우연성이다. 단순히 인간이라는 것에 의해 공통의 유대를 갖게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모든 인간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른 모든 동물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 즉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뿐이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논점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은 우리의 도덕적 어휘가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에게도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은 대응 방식은, 동물적인 고통에서 인간적인 고통을 구별시켜주는 어떤 것을 분리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오브라이언이 등장한다. 오브라이언은 언어와 문화 속에서 사회화된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능력을 공유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즉 그들을 사회화시킨 (혹은 스스로 만들었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언어와 신념의 특정 구조를 강제로 해체당함으로써 누구나 모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P370. 이쪽 현실세계에서 저쪽 이상세계로 나아갈 방법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도덕적 결단력이 없어서도 아니고, 이론적 피상성이나 자기기만, 더 나은 철학적 설명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태가 우연히 일어나는 방식일 뿐이다. 오웰의 정치 상황에 대한 비관주의적 서술은 오늘날의 정치적 숙고가 가진 거대한 비타협적 사실로 남아 있다. 이것이 모든 자유주의 시나리오를 봉쇄하는 것이다. 나는 유럽과 미국의 좌파들이 이론적 궤변 속에서 도피처를 찾음으로써 이런 사실을 외면하려 노력해왔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실천적 시나리오가 불필요한 것처럼, 그리고 지성인들이 훨씬 "급진적인" 이론적 어휘를 통해 명백한 악을 비판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해왔다.

P371. 첫째, 나는 "정치적 신념은 실제로...", "인간 본성은 실제로..."와 같은 형식의 거대한 관점이나 거대한 철학적 주장을 통해서 특정한 정치적 신념이나 포부를 불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철학적 관점은 사태를 매듭짓는 방법이며 그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에 관해 자기의식적으로 되는 것이지, 그런 정체성에 대한 정당화도 아니고 그것을 파괴시킬 수 있는 무기도 아니다. 둘째, 그런 거대한 관점은 탐구와 논증 그리고 진리 추구를 "폐기"할 수 없다. 이것은 그것이 사랑이나 음식에 대한 추구를 "폐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철학이 아니라 오로지 힘만이 그런 폐기 작업을 할 수 있다. 셋째, 오브라이언을 "자연적인" 것에 관한 거대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 버넘인 양 독해해서는 안된다. 오브라이언은 모든 것이 권력에의 의지를 감추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구둣발이 영원히 지속되는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다고 말할 뿐이다. 미래의 향방은 혜성이나 바이러스만큼이나 순전히 우연적인 사실의 문제인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오브라이언의 설명이야말로 실로 무시무시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밑받침해주는 독해는 바로 이런 독해이다. (중략, P372) 오웰은 실제 사람들에게 실제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우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알고 있는 일들을 능숙하게 상기시키고 그런 일들에서 외삽하는 방식으로, 오브라이언이 미래 사회에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유형의 인물임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 그 미래 사회란 바로 지성인들이 자유주의의 희망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사회이다. 이런 주장에 제기될 수 있는 최초의 반론은 오브라이언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고문하는 사람들은 아이히만, 그라두스, 파둑 등과 같이 무감각하며 진부한 인물들이다. 오브라이언처럼 "호기심 많고 교양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광경을 고정시킬 수 있는 인물은 오브라이언이 표방하는 의도를 가질 수 없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오웰은 H.G. 웰즈가 "현대 세계를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제정신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최초의 반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 그는 역사가 웰즈가 꼭 그렇게 가리라고 생각했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상력을 가진 데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것이 오웰이 오브라이언을 창조해냈을 때조차도 역사가 꼭 그렇게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믿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웰과 나보코프로 하여금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반이론적 성향은 사태가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는 점,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점을 확신케 했다. (중략, P374) 이런 유비의 요점은 기독교와 결부된 관념의 복합, 예를 들어 상호 연민은 정치적 연합을 위한 충분한 기반이라는 관념, 부, 재능, 체력, 성, 인종의 구별이 공공 정책에 부적절하다는 관념 등이 오브라이언의 과두 집산주의와 결부된 관념만큼이나 한때는 전혀 타당해 보이지 않았던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윌리엄 윌버포스나 제임스 밀과 같은 사람들은 몽상가의 병적인 상상력을 통해 혐오스럽고 히스테리컬한 기획을 내놓는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오웰은 유럽의 패권이 불쌍한 사람들을 동정하고 인간 평등을 꿈꾸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간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세계가 그런 감정이나 생각을 결여한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그저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거듭 말하지만 사회화는 모든 부분에서 일어나며, 누가 사회화를 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종종 누가 누구를 먼저 죽이느냐 하는 문제이다.

P373. 오웰이 오브라이언이라는 인물을 창조해내기 위해 자신의 사디즘을 사용한것은 내가 보기에 자기인식과 자기극복의 승리이다.

P388. 왜 "그녀는 유대인이다"라는 말이 "그녀는 나처럼 어린아이들의 어머니이다"라는 말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인간적"이라거나 "인정이 없다"거나 "인간적 연대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은 그와 같은 설명이 될 수 없다. 그런 문맥 속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혐오감에 몸을 떠는 일에 불과하다. (중략, P389) 이런 사례들의 요점은 우리가 연대를 표명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때 우리의 연대감이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보다 더 작고 더 지역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인간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관대한 행위에 대한 약하고 설득력 없는 설명인 이유이다.

P390. 나의 입장은, 연대감은 필연적으로 어떤 유사성과 이질성이 우리에게 현저하게 느껴지느냐 하는 문제이고, 무엇이 현저하게 느껴지느냐는 역사적이고 우연적인 마지막 어휘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편, 나의 입장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느낌을 이전에는 "그들"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확장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중략, P391) 내가 제시하고 있는 관점은 도덕적 진보와 같은 것이 있으며, 이 진보가 실제로 더 큰 인간적 연대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연대는 모든 인간 속에 있는 핵심 자아, 인간적 본질의 인식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연대란 고통과 모욕을 겪을 수 있는 유사성과 비교해볼 때 전통적인  차이를 점점 중요치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우리 자신과 매우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영역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근대의 지식인들이 도덕적 진보에 공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이나 종교학 논문을 통해서보다는 온갖 형태의 고통과 모욕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통해서였다.

P393. 버나드 윌리엄스는 기독교로부터 칸트를 거쳐 물려받은 의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일련의 독특한 제도peculiar institution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다음 구절에서 요약한다. "도덕성은 단호하게 일련의 대조를 강조한다. 즉 힘과 이성, 설득과 이성적 확신, 혐오와 부인, 단순한 거부와 도덕적 비난 등의 대조처럼 말이다. 이렇듯 대조를 강조하는 데로 이끌어가는 태도는 순수하다는 꼬리표를 붙일 수 있다. 도덕성의 순수함, 즉 다른 종류의 감정적 반응으로부터 도덕적 의식을 고집스럽게 추상해내고자 하는 태도는, 우리 공동체의 상식을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수단을 감출 뿐 아니라 그런 수단의 효력도 은폐하고 있다. 그런 효력은 체계의 바깥에서만, 즉 그것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관점으로부터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도덕성 체계는 닫혀 있으며, 도덕성 그 자체 이외의 어떤 가치를 그 체계에 적용하려는 것을 말도 안 되는 착오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P394.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런 개념은 없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핵심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단지 우리 삶의 공적인 측면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이 공적인 측면이란 우리의 사적인 기호 및 우리의 사적인 자아창조의 시도와 맞서 있는 측면이며, 그런 사적인 동기에 대해 자동적인 우선성을 갖지 못하는 측면이다.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공적인 측면이 우선되는지 여부는 심사숙고를 통해 결정되어야 할 문제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도덕적 의무는 다른 많은 숙고들을 자동적으로 능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런 여러 숙고들 속에 함께 던져져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P395. 적절한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일이 끝난 뒤 문제이며, 대체로 스콜라적인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전쟁이 정의로운 것인지, 사형이나 낙태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먼저 숙고하고, 그 다음에 침략자나 살인자, 태아의 "지위"에 대해 걱정한다. 우리가 그 반대 순서로 하려고 할 때, 우리는 철학자들이 원래의 실천적 물음보다 논쟁의 여지가 적다고 할 수 있는 인간성이나 합리성에 대한 충분조건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원래의 실천적 물음의 세부사항 (침략자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것인지, 누가 왜 처형되는지, 누가 언제 낙태를 결정하는지 등)이다. 거대한 일반 원리는 끈기 있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며 그 일반 원리가 포함하고 있는 핵심 용어는 그 결과에 따라서 재정의되는 것이다.

P397. 인간적 연대란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감이 지닌 우연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에 대한 니체의 논점을 인정하면서, 상상의 초점focus imaginarius(예를 들어 절대적 진리, 순수 예술, 인간성 그 자체)이 인간의 마음속에 붙박이로 갖추어진 특징이라기보다는 발명품이라고 해서 나빠질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단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무를 진다"는 슬로건을 받아들이는 올바른 방법은, (중략, P398) 이 슬로건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폭넓은 연대감을 창조하도록 우리를 독려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잘못된 방법은, 그런 연대를 (마치 우리가 인식하기에 앞서서 존재하는 어떤 것처럼) 인식하도록 우리를 몰아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이 연대가 진짜인가?"라는 요점을 잃은 회의적 물음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종교와 형이상학의 종말이 잔인하지 않게 되려는 우리 시도의 종말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니체의 암시에 우리 자신을 열어놓게 되는 것이다. (...) 이런 슬로건들을 올바로 독해하게 되면, 철학을 민주 정치에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철학은 새로운 신념(예를 들어 여성과 흑인은 백인 남성이 생각한 것 이상의 능력이 있다는 것, 소유권은 신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 성적인 사안은 사적인 관심사일 뿐이라는 것 등)을 수용하기 위해 도덕적 숙고에 관한 우리의 어휘를 다시 엮는 서술의 하나가 된다.

P399. 우리는 언제나 (도덕적 의무와 사적인 관여 사이의 갈등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몇 개의 공동체에 속해 있어서 서로 갈등하는 도덕적 의무들을 갖는다는 사실과 같은) 딜레마를 안고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딜레마가 철학 법정이 발견하거나 적용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더 폭넓고 고차적인 일련의 의무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우리가 가진 마지막 어휘가 어떻게 확장되고 개정될 수 있을지를 알려주는 힌트에 귀를 열어둔 채로 그런 마지막 어휘를 가지고 작업해 나가는 것뿐이다. (중략, P401) 잔인성이야말로 우리가 행하는 가장 나쁜 짓이라는 자유주의자의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중립적이며 비순환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주장의 타당성을 우리 20세기 자유주의자들에게 확신시킨 사회화 과정의 배후를 들여다볼 수도 없으며, 그런 과정을 실현시킨 역사적 우연성보다 더 "실재적인" 혹은 보다 덧없지 않은 어떤 것에 호소할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동일시하는 공동체의 "우리 의식" 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없다는 셀라스의 주장이 갖는 힘의 일부이다. "인류"나 "모든 이성적 존재"야말로 그런 집단 중 가장 큰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런 자문화중심주의ethnocentrism의 저주를 벗겨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런 동일시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오히려 자문화중심주의의 저주를 벗겨내는 것은 스스로를 확장시키면서 더 크고 다양한 에트노스ethnos[종족]를 창조하는데 헌신하는 "우리"들의 자문화중심주의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바로 자문화중심주의를 불신하도록 훈육받아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이다.

P402. 요약하자면, 나는 "인간성 자체"와 동일시된 것으로의 연대와, 지난 수세기에 걸쳐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차츰 고취되어온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적 연대를 구분하고 싶다. 이 의심은 타인의 고통과 모욕에 대한 자신의 감수성에 대한 의심이며, 현재의 사회제도들이 이런 고통과 모욕을 다루기에 적합한 것이냐에 대한 의심이며, 가능한 대안에 관한 호기심이다. "인간성 자체"와 인간적 연대를 동일시하는 것은 철학자의 고안물이며, 신과 일체가 된다는 관념을 세속화하려는 조야한 시도일 뿐이다. 자기의심으로서의 인간적 연대는 내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고통받고 있는가?"라는 물음과 "당신은 우리가 믿고 원하는 것을 믿고 원하는가?"라는 물음을 구분해낼 수 있게 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대를 특징짓는 표지로 보인다. 이런 물음들을 구별하는 것은 사적인 물음과 공적인 물음을, 인생관에 관한 물음과 고통에 관한 물음을, 아이러니스트의 영역과 자유주의자의 영역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이것은 한 사람에게 두 가지를 모두 가능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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