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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라> - 션 베이커 본문

감상/영화

<아노라> - 션 베이커

날들 2024. 11. 7. 01:16

 

//// 무더기 스포일러 ////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난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씬이 싫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씬은 감독이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페인트만 화려하게 칠해놓은 게 다인 모텔에서, 자신들이 방치되는지도 모르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바로 근처에 있었던 디즈니랜드에서 뛰어놀게 해 준 것이다. 하지만... 그 디즈니랜드는 '이중 환상'이다.

첫 번째로, 아이들의 디즈니랜드 출입 과정이 완전히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그냥 달리다 보니 도착했으며 도착하고 보니 디즈니랜드라 놀란다. 인물이 영화 내에서 실제로 겪는 일인지도 불분명한 '외전'에 가까웠다. 외전적 성격을 지닌 환상을 통해 등장인물을 위무한다는 게 가능한가? 본래의 플롯 내에서 아이들에게 위로를 줄 방법을 찾지 못한 감독의 능력 부족은 아닐까? 현실이 정말 그 정도로 암울하다는게 감독의 결론이라면, 우리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선물' (어쩌면, '영화') 은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을 재확인할 뿐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건 타인의 일시적인 선물이 아닌 현실을 개선하고 사회구조에 맞서는 인물들의 시도, 그 시도에 대한 지지와 선의다. 어쩌면 감독은 인물에 대한 위로보다 그저 자신이 특정 광경을 보아야만 하겠다는 이유가 앞선 나머지 또 다른 세트장을 만들고 캐릭터를 납치해서 놀라고 벅차 하는 연기를 시킨 것은 아닐까. "그 편이 더 나은 일이기에" 대뜸 부모에게서 아이를 떼놓으려는 아동국 직원의 일방적임과 '선물'의 일방적임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두 번째로, 디즈니랜드 자체가 각박한 현실에 치이는 사람들의 환상이 집약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디즈니랜드에 가면 행복해하는가? 디즈니랜드를 가도 일상은 그대로다. 나의 하루가 좀 더 특별해질 수는 있으나, 집에 돌아온 내일은 그대로이며, 악과 고통은 없어지지 않는다. 디즈니랜드는 삶이 살아갈 만하다는 걸 입증하는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기 위한 유희를 원한다. 그리고 현대의 유희는 환상으로 의미를 확장하여 자신이 최종적 '행복'이라고 사람들을 유혹하고, 그 중 행복은 물론이고 스스로 '꿈'과 '희망'임을 자처하는 디즈니랜드는 더욱 악질에 가깝다. (나는 이 문단에서 '유희'를 한계가 분명한 작업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내가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진정한 영화'는 유희를 넘어선 무언가라고 말할 수 있는가? 영화는 현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영화가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겠다.) 감독이 결코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이들에게 디즈니랜드와 같은 '환상'을 선물하는 지극히 기성세대스럽고 다소 무책임한 문법을 왜 반복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론. 감독은 '환상'을 '환상적'으로 '선물'했으며, 나는 그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2024년, 아노라.

<아노라>에서도 션 베이커는 그대로였다. 이번에도 그는 백일몽에 빠진 등장인물을 찾아냈다. 그 등장인물의 절망과 발버둥을 따라갔으며, 마지막엔 등장인물에게 선물을 줬다. 그 선물이란 이고르이며, 나는 이 인물 역시 어느정도 '환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애니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말단인 인생이며, 그렇기에 애니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꽤 남성적이고, 다정하며, 애니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낸다. 이런 인물이 코미디 문법으로 탄생한 철없는 부자의 엉성한 용역 집단에 섞여 있다는 게 작위적이라 느껴지는 건 또다른 나의 편견일까? (물론 나는 인연의 본질은 우연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와중, '인물'이 선물에 반응을 시작하자 영화의 공기가 달라졌다. 애니는 선물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애니는 이미 누추한 일상의 문턱으로 돌아와 있다. 밤엔 클럽에서 일하고 낮에 자야 하는데, 바로 옆에 철길이 있는 집 앞에 돌아와 있다. 애니는 한때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이 미친듯이 밉다. 결국 이렇게 될 거면서 자신을 속인 세상이 끔찍하다. 사랑이라는 허울에 속아넘어간 '창녀'가 나인데, 그저 대가 없는 호의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고는 자존심이 버티질 못했을지도.) 그러니 키스에도 응할 수 없었다. 키스에 응하지 않으면서 또 한번 완력을 거부해야 하기도 했다. 애니는 좌절했다. 날 현실에서 꺼낼 능력도 없는 이 남자는 왜 이런 호의로 나를 시험하는 것이며, 왜 나는 보답으로 이런 것을 줄 수밖에 없으며, 이 남자가 키스를 원하는 동기는 과연 무엇일지. 그게... 변함없을지.

<아노라>에서 션 베이커는 달라졌다. 선물은 '디즈니랜드'에서 '날 엿 먹인 일당과 일하는 삭발 똘마니'가 됐으며, 인물은 선물에 반응해서 행동했고, 선물의 무력함을 간파했으며, 그 선물에 안겨서 울었다. 진실했다.

 


호랑이들어와요 / 배세혁, 유은. 네이버웹툰

그렇게 관람 직후에는 <아노라>의 엔딩이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엔딩보다 발전했다고 판단했는데, 지금은 또 그렇게 확언하진 못하겠다.

첫째로, 아이들에게 디즈니랜드 장면을 선물하는 감독의 심정이 이고르 위에 올라타는 애니의 심정과 같지 않을까, 즉 자신이 가장 잘 하는 걸 줄 수밖에 없겠다는 심정이었을까 싶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이들이 커가며 현실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 완전히 좌절하지 않도록, 어른이 완충지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닿았기 때문이다. 웹툰 <호랑이들어와요>를 보다가 상기하게 된 사실인데, 아이들은 어른과 다르다. 상실도 선악도 사랑도 증오도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고,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큰 감정소모를 동반한다. 주인공 꼬마가 아기새 동생을 잃고 슬퍼할 때, 누군가 새 모양 인형을 만들어 주자고 해결책을 낸 것에 "아이들에 대해 잘 안다"고 평가하는 장면을 보고 든 생각이다. 환상은 '아이다움'을 지탱하며 현실에의 연착륙을 돕고, 이는 아이들이 끝내 '어른'이 되어도 "뭔가를 바랄 수 있는" 진실한 능력을 심는다. 상상력이 있어야, 삶을 가꾸고 사회를 바꿀 것 아니겠는가?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아노라>의 엔딩 차이는 단지 주인공이 아이와 성인이라는 차이에서 발생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션 베이커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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