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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 미로슬라브 볼프 / (1) 1장 ~4장 본문

< 단상들 >
1. 이 책이 '최선'의 신학을 표방하는 것이 좋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폭로한 '주체'와 '사회'의 부조리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신과 예수의 이론적 필연성을 '객관적'으로 납득시키려 들지 않고 기독교적 전통에 깔끔하게 의존하는 태도를 보인다. 대신 왜 기독교 사상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물리칠 방법으로, 폭력의 사슬을 끊는 방법으로 적절한지에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철저히 세르비아인의 폭력에 짓밟힌 크로아티아인이라는 비참함에 기반하여 쓰였다. 당사자성의 모범적인 예다. 나 역시 최선의 기독교인이고 싶다. 단어를 바꾸어 표현하자면 '가능한 것들'에 집중해서 나의 본질과 현대사회가 직면한 과제에 걸맞게 적용하고 싶다. 형이상학적이기보단 현상학적인. 논리의 치밀함보다는 근원적인 좋음을 유지할 방법을 생각한다.
2. 그러나 여느 기독교 윤리서적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실행에 옮기는 난이도에 비해 결론을 너무 쉽게 서술한다는 느낌이 든다. 지구 멸망은 필연적이니 인류를 위해 일단 인공위성이라도 타고 안드로메다로 떠나자는 주장을 보는 기분이다. 잘 짜여진 공식에 감탄하는 수학자처럼, "자기희생으로 승리한다 / 구별하되 배제하지 않고 포용하라 /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니 절대적인 신의 말씀으로 행동하라" 같은 역설적인 주장을 하면서 저자는 이 결론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딱 떨어지는 아름다움인지 체험하고 있는듯 보이지만 일반인들이 이런 특수한 미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물론 신적인 개념이기에 인간의 '언어'로 치환할 수 없으며, 행동할 때 비로소 말에 담긴 참된 의미가 드러나는 경구들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관심있는 건 오로지 "그래서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이다. "신이 없으면 못해? 그런데 내 삶에 신이 없는데? 그럼 불가능하네?" 라는 논리적 회로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이 책은 이 지점을 설득할 수 없고, 설득하려는 의도도 없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신의 초대장이 아니라, 이미 신의 초대를 수락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행동강령이다. 선량하고 약한 타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불쾌함'을 주는 타자까지 배제하지 않을 수 있는지, 어떻게 폭력의 논리에 젖어들지 않으면서 동시에 적극적으로 정의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그럴 수 있길 진정으로 '원하고' 있는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안드로메다를 원하게 되어 버린 사람들을 위한 가장 충실한 안내서다.
3. 죄를 이길 수 있는 건 그 누구도 아니고 오직 죄를 마주한 인간 당사자 뿐이라는,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의지와 용기, 상상력을 통해 더 좋은 선택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자유의지에 관한 이 책의 주장이 흥미롭다. 내 다음 관심사는 왜 신학이 신을 소환하는가다. '힌트'는 얻을 수 있을지언정 결국 선택의 우리의 몫이고 실제로 선택을 할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신학은 왜 신을 소환하는가? 신이 없다면 최종적 화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조차도 최종적 화해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고 '새 세상'을 통해 이룩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 '최종적 화해'를 가정하는 일이 과연 필요한가? 없으면 억울하니까? 억울함은 결국 방향을 잃은 분노의 다른 모양 아닌가? 철저히 현실에 매인 존재인 우리가 [현실에서 '최종적 화해'란 없다는 '사실'] 말고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는가? 나의 세계는 벌어질 일이 벌어지는 세계다. 거기에 신은 '부재하고' 있거나, '흐릿하거나', '다른 차원에' 있거나, 아니면, '없다'. 나는 최종적 화해가 없는 현실을 살아갈 때는 이 구분이 불필요하다고 느끼며, 신을 분리한 채 기독교적 유산이 존재가능한지, 그리고 유용한지 알아보고 싶다.
4. 미러링은 성공했지만, 미러링이 성공했기에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보편윤리'로 받아들여지는 데 실패했다. 폭력과 혐오의 맥락은 그 결과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에는 오직 촘촘하게 엮인 피해와 가해만이 있다. 미러링은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자신들을 끌어내렸다.(실제로 같은 수준이긴 한가?는 다른 문제다. 피해자는 무고하지 않을 수 있고, 가해자와 무고하지 않은 피해자를 구별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내가 집중하는 것은 보편적 인식에 대해서다.) "네가 잘못했어"와 "너도 당해봐"는 다르다. (실제로 미러링이 상대가 잘못한 것과 '동일한 수위'의 피해를 주었는가?도 다른 문제다.) 미러링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전략에 이르지 못하고 각자 진영의 사기를 진작하는 수단에 그쳤다. 폭력으로 상대를 움츠리게 하는 것은 언제나 미봉책이다. 상대에게 더 큰 힘이 생기기만 하면 더 큰 반발력으로 돌아올 뿐이다. 힘의 적당한 균형으로 서로를 불쾌해하며 '각자 갈 길 가는' 상황은 평화가 아니고 분단이다. 미러링은 대화와 토론이 운신할 공간을 진영논리와 무력행사가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5. 전장연 시위에 관한 논쟁도 결국 힘의 논리에 의거한다. 장애인들은 '그냥 그렇게 주어진' 억압적 질서에서 힘 VS 힘의 구도로 전환을 꾀했으나, 그들의 힘이 부족했다.(장애인들은 그냥 탑승만 했을 뿐이다!라는 주장이 존재한다. 무슨 의미인지 십분 이해하지만, 행위는 행위자만 정의할 수 있는 행위자의 소유물이 아니다. 실제로 동승자들의 피해가 발생했든, 권력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든 결과적으로 전장연 시위는 '힘'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전장연은 '힘'으로 인식된 그들의 전략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들의 논리 역시 힘의 논리임을 모르는 비장애인들이 많아 보인다. 비장애인들에게는 순수한 '힘'을 행사하기 전에 포장된 '권력'을 행사할 기회가 있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힘'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멸했고, 집단적 (여론)린치 혹은 철저한 무시를 통해 그들 안에도 내재되어있는 폭력을 마주보는 일을 거부했다. 얼핏 더럽게 느껴지는 내 '힘'도 법이나 경찰이나 용역이 대신 써 준다면 '정당'해지고, 그렇다면 안심하고 계속 힘을 쓸 수 있으니까.
6. 당연히 서로 상대가 이기적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모두가 폭력을 전제함과 동시에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심화되면서 한국의 리바이어던이 탄생하는 것 같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꽤나 사적인 영역에서까지 정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집행하길 바라며, 내 일상에 불쾌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회적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일에 강박적으로 임한다.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행정력을 원하고 있다. 점점 규제가 많아지는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만큼이나 규제를 지지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한국인들은 리바이어던이 맘에 들지 않으면 '머리를' 교체해서 새로운 리바이어던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단순히 먹고사는 것 이상으로 옳고 그름에 관심이 많으니, 어쩌면 정부기관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물론 소위 '높으신 분'이 되지 않고서야 옳고 그름의 범위를 고민할 일 없이 단순히 정해진 법과 명령을 집행할 뿐일 테고,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리바이어던을 원하는 착오적인 시민들 때문에 일선 공무원 조직에 과부하가 온 상황이지만 말이다.
P31. 포스트모더니티는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 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인간관계를 '단편적'이며 '단절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탈과 책임 회피"를 조장한다.
P39. 이 세상에서 상호성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은 자기 내어줌에 대해, 자기 내어줌이 아니라 착취와 무자비함으로 대응한다. 일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반대하는 것은, 자기 내어줌이라는 개념 자체보다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기를 내어 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다. (중략) 십자가의 궁극적인 스캔들은, 자기 내어줌이 긍정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에 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희생하지만, 가해자의 권력을 안정시켜 줄 뿐이다. 폭력이 몰아칠 때, 자기를 내어주는 행동은 곧 어둠에 가려진 하나님 앞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이 될 뿐이다. 나는 이 스캔들을 우회하는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방법은 없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능한 선택은, 십자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거부하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이를 따르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걸려 넘어지는 것뿐이다. (중략, P43.) 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철학자들이 추구했던 그 희망에 대한 '철학적 필연성'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통제'와 '이성'에 기초하고, '견딜 수 없는 것'과 '치유할 수 없는 것'을 보지 못하는 희망이 죽는다면, '견딜 수 없으며 치유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소망이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망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부활에 기초한 십자가의 약속이다. (중략, P44) 그것은 사회적 세계를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범주로 구별하려는 시도를 초월한다.
P88. 포함inclusion의 승리라는 근대의 이야기는 얼마나 적절한가? 파괴하고 완전히 대체하기를 원하는 외부자로서가 아니라, 건설하고 개선하는 것을 돕기 원하는 내부자로서 나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공산주의 통치의 '모든 축복'을 누렸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포함'이라는 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진실이 전혀 없으며 그 결과가 대체로 불행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위험하게 들린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여성과 소수자들은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것이며, 자유 민주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기존의 다른 대안적 체제보다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겠다고 말할 것이다. '포함'의 진보는 근대성이 이루어낸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을 순간적으로 변형시키는 마법 거울처럼, 앨런 울프가 바르게 지적했듯이 "역사가 인간의 잠재력을 더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계된 어떤 목적이 있다고 느끼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만든 거울이 아닌, 다른 거울을 들여다본다면 어떤 얼굴이 나타날까? '하위 근대성'의 작업장에서 만들어 낸, 착취당해 말라 버린 '타자'의 손에 들린 거울 속에서는 오랫동안 악을 실천함으로써 얻은 추한 주름이 근대성의 얼굴 위에 나타날 것이다. 완벽하게 '행복한 결말'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간단히 포함이라는 근대적 내러티브에서 소거된 사람들은, 배제exclusion라는 길고도 소름끼치는 대항 내러티브를 요구한다. (중략) 근대성은 비유럽의 타자를 야만적으로 정복하고 식민화하고 노예로 삼았던 과거를 문명의 빛의 확산이라는 신화로 정당화한다. 부인할 수 없는 포함의 진보를 가져온 것은 사실 끈질긴 배제의 실행이었다. (중략) '인종 청소'라는 은유로 표현되는 배제는, '지금'의 문명에 반대되는 '그때의' 야만성, '여기'의 선함에 반대되는 '저기'의 악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배제는 문명 안의 야만성이며, 선한 것들 사이의 악이고, 자아의 벽 안에 있는 타자에 대한 범죄다.
P95. '경계 없음'이란 '지능을 갖춘 행위자가 없음'을 뜻할 뿐 아니라 결국에는 '생명 없음'을 의미한다. 모든 질서에 맞서 싸우며 순수하고 추상적인 비질서를 옹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그리고 순전한 환상으로서도 매력적이지 않다). 비질서는 아무런 속성을 갖지 않는 '피조물', 아무것도 구별해 낼 수 없으며 아무런 행복과 기쁨도, 아무런 자유와 정의도 찾을 수 없는 공간일 것이다. (중략) 푸코의 주장처럼 모든 경계가 자의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필연적으로 억압을 수반한다면, 이런 움직임은 지배를 사회적 삶의 구조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없으며 억압을 영속화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다. 일관되게 포함을 추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경계 없는 혼돈과 경계가 존재하는 억압 사이의 불가능한 선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 양자택일을 피하기 위해 푸코가 주장하는 경계의 해체를 일관된 원칙을 고수하는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전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은, 너무 많이 판단하는 것보다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묻는 것이다. 악의 현란한 가시성과 그것을 명명하지 못하는 우리의 절망적 무능력 사이에 불쾌할 정도로 큰 간격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기괴한 것의 역설적 정상화를 목도하고 있고 그래서 "정상적"이라는 말이 금기어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P100. "한 사람의 자아됨은 너무나 친밀하게 타자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타자 없이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P102. 리처드 로티는 "아이러니의 태도"가 "판단의 규칙"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가장 중요한 신념과 욕망이 우연적이라는 사실" 즉 그것이 "시간과 우연의 범위 너머에 있는 무언가와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략) 아이러니의 입장은 풍요로움에 도취된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적인 자기 이미지를 만들고 신념과 욕망의 망을 다시 짜는" 일에 자기 중심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아, 박해, 억압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착취하고 박해하고 억압하는 이들이 심판을 받을 때에만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정당한 '배제'가 있다면 그것은 결코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악을 처리하는 문제다. 그렇다면 배제를 악이라고, 구별을 긍정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판단 자체는 배제의 행위가 아니다. 반대로 그런 판단은 배제에 맞서는 투쟁의 시작이며, 배제적 판단에 대한 처방은 분명 '아이러니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는 정당한 '구별'과 정당하지 않은 '배제'가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며 적절하게 판단하고, 배제하려는 욕망 때문에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판단하는 성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로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P118. 만약 타자가 배제당하면, 그러한 배제를 실행한 것은 체제다. 나는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 체제에 참여하며, 그 체제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에 저항하지 않는다. 나는 눈을 돌려 버린다. (혹은 색다른 고통의 전형을 카메라로 클로즈업해서 본다. 이 역시 눈을 돌리는 것과 다름없다. 고통을 바라봄으로써 나의 도착적 욕망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고통당하는 사람에게서 마음을 돌려 버린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달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의 관심사에 몰두한다. 내가 협력하기는 하지만 나의 의지와 별개로 배제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감각해진 나는 두려움을 느끼며 내가 거기에 연루된 것도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식으로 논리를 만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에 이르는 길에는 언제나 매를 맞아 반쯤 죽어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나는 별 고민 없이 그들을 지나칠 수 있다. 아니 지나쳐야만 한다. 무관심은 그런 생각을 만들고 또한 실제로 우리가 그런 생각을 성취하도록 만든다.
P121. 폭력의 세상 속에서 희생자는 무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중략) 폭력은 희생자의 정신이 덫에 걸리게 하며, 방어적인 반응의 형태로 폭력적인 행동을 촉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죄함을 앗아간다. 그는 "세상을 깨끗이 희생자와 가해자로 나누는 태도는 개개인이 문화적 죄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무시한다. 순전히 무죄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악을 자행하는 사람은 남에게 해를 입힐 뿐만 아니라, 무죄함 없는 세상을 계속해서 재창조한다.
P129. 무죄함이란 없다는 관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는가? 우리는 그저 무기력하게 '옮음이 그름이고 그름이 옮음인' 세상을 응시할 뿐인가? 모든 행동이 가망 없는 시도에 불과하므로, 도무지 개선이란 불가능한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끊고 물러나야 하는가? 죄 안의 연대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제도가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망상'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자기 의를 깨뜨려 주며, 우리가 임의로 정해 놓은 선의 이름으로 악을 영속화하지 않도록 막아 준다. 죄 안의 연대는 죄책과 순수를 도덕적으로 할당하는 논리에 의존하는 접근 방식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문제는 정직하게 살고, 순수하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결코 무죄할 수 없는 세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이다.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참으로 무죄한 희생자이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메시아와 그분이 지켜 내신 모든 것의 이름으로, 배타적인 도덕적 양극성 - 이곳 우리 편은 '의로운 사람' '순수한 사람' '무죄한 사람' '참된 사람' '선한 사람들'이며, 저쪽 상대편은 '불의한 사람' '타락한 사람' '유죄한 사람' '거짓말쟁이' '악한 사람들' 이라는 - 을 중심으로 구축된 세상이 어쩔 수 없이 죄에 빠져 있음을 폭로해야 하며, 받을 자격 없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경륜이 도덕적 보상의 경륜보다 우월함을 깨달음으로써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무죄와 죄책, 순수와 타락, 진리와 거짓이 엇갈리고 교차하는 세상을 변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 개인의 행위는 비참하며 심지어 악마적이기까지 하지만, 어느 누구도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 하에 화해의 사역을 추진해야 한다.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타자와의 관계는 그들의 도덕적 행적에 의존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관계가 폐기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죄한 사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악을 행하는 사람임을 알 때조차도 그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P132. 사람들의 행동이 사회적 환경과 과거에 입은 피해에 의해 결정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가해자들이 원하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그들이 저지르고자 하는 모든 악행을 미리 사죄해 주기 때문이다.
P139. 단지 자아가 스스로 "실재의 총체"이기를 고집하고 "모든 것"을 자신을 내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고 할 때만 배제가 일어나는 게 아니다. 자아가 타자 - 특히 멀리에 있는 타자 - 에게 세계의 나머지 공간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온전할 권리를 부여하면서 스스로 자기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배제가 일어날 수 있다. 서로 삶이 얽혀 있는 다수의 행위자들이 살고 있으며 재화가 희소한 환경에서, 한 사람의 자기 주장은 타자의 자기 주장과 부딪힌다. 따라서 그 사람은 타자에게, 지각된 혹은 실제적인 위협이 된다. 대개 그것은 타자의 삶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 자기 경계에 대한 위협이며, 따라서 자아의 내적 구조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의 건전한 자기 주장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P140.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가 건전한 것이 되려면, 반드시 타자가 자기 안에 거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그 결과, 자아와 타자 사이의 긴장은 정체성을 향한 욕망이 된다. 나는 타자에 맞서 자기를 주장해야 하지만, 내가 나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바로 그 타자가 나 자신의 일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타자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지 않는 자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타자를 통합시키고 싶어 하고, (중략)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아의 역동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분리는, 타자를 희생시킴으로써 정체성을 주장하고자 하는 배제로 변질된다.
P141. 또한 정체성에 대한 욕망은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수동적으로 죄에 희생당하는 것을 감수하는 이유 - 그들이 스스로 배제당하기를 감수하는 이유 - 를 설명해 준다. 그것은 단순히 자신이 되자고 하는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타자에게 굴복함으로써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타자를 배제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배제하는 역설적인 - 페미니즘 신학자들이 "자아의 분산"이라 부른 - 태도다.
P148. 죄의 논리는 선을 행하라는 명령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죄 앞에서 죄에 관한 지식은 무력할 뿐이다. 죄에 관한 지식으로는 죄를 극복할 수 없다는 지식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율법을 주시고 조언을 해주시는 분에 불과한 하나님은 무력하다. 죄는 앎의 실패가 아니라 의지의 그릇된 방향 설정이며, 그 자체로 대항하는 지식을 만들어 낸다. 중요한 의미에서 가인Cain만이 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행사해 죄를 범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죄를 범하는 것은 그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권세를 다스리지 못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P156.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른다. 스스로 파괴되기보다는 타자를 파괴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의지와 용기, 상상력이 있다면 노골적인 양극성을 극복할 수 있다.
P162. 실제 갈등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명백하게 선한 쪽과 의심의 여지 없이 약한 쪽 사이의 관계로 묘사할 수가 없다. 한쪽이 더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더 약해서 잔인해질 기회가 더 적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 '억압/해방'이라는 범주를 중심으로 우리의 도덕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누가 책임이 있고 누가 무고한지에 관한 명확한 내러티브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무랄 데 없는 희생자를 찾기에 실패한 채, 우리는 똑같이 매력적이지 않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도덕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개입에서 물러나거나(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은연중에 더 강한 쪽을 지지하거나), 편파적인 도덕을 주장하며 경계가 명확한 도덕적 내러티브를 강요하는 것이다(그러므로 한쪽 편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기만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P170. 화해를 가로막는 것은 내재적 비교불가능성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와 평화 협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또 새로운 갈등과 불일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중략) 바른 물음은, 어떻게 최종적 화해를 이룰 것인가가 아니라, 최종적 화해의 부재 속에서도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에게 어떤 자원이 필요한가이다.
P182.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런 태도가 대체 어떤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있단 말인가? 어째서 예언자들은 약자들의 그런 태도에 대해 회개하라고 촉구했을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포스트모던의 윤리>에서 시기의 사회적 의미에 관해 논평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기의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지배자들의 사상'을 '지배적인 사상'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다. 일단 특권적인 지위와 특정 가치 사이의 연관성이 사회적으로 구축되고 나면, 특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암묵적인 부추김을 받아 자신들도 그런 가치를 요구함으로써 자신이 당하는 모욕에 대해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가치의 유혹하는 힘은 더욱 강화된다.] 시기에 관한 바우만의 예리한 통찰은 적대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바우만의 용어를 사용해, 적대감의 가장 중요한 영향력은 지배자들의 폭력적 관행을 지배적인 관행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중략) 시기와 적대감은 특권을 갖지 모한 사람들과 약자들이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을 때조차도 그들을 지배 질서의 사슬에 묶어 둔다. 물론 그들조차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바우만이 말한 것처럼, 그들은 "게임을 새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카드만 다시 섞으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게임 자체를 비판하지 않고, 상대가 더 좋은 패를 가지고 있다는 탓만 한다". 지배적 가치와 관행은, 그 아래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마음을 장악하는 그 힘이 깨어질 때만 바뀔 수 있다. 회개가 필요한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중략) 회개는 희생자들이 압제자들을 모방하거나 비인간화하는 것을 막아 줌으로써 희생자들을 '인간화'한다. 회개는 결코 지배 질서에 대한 묵인이 아니며, 옛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라는 피난처를 만들어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옛 세계의 변혁을 가능하게 만든다. (중략)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너무나 자주 압제자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스스로 원수의 거울 이미지가 되도록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자신이 그런 반응에 대해 책임이 없다거나, 그런 반응이 해방의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반응에 대해 변명하고자 했던 마음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한다. 만약 오늘 희생자가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그들이 가해자가 되어 자기 기만 속에 스스로 희생당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행에 대한 책임을 면하려고 할 것이다. (중략) 이 이야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난의 노예로 묶어 두는 것은 단순히 '나쁜 가족 가치관' 때문이라거나, (마치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수한 성품을 통해 살아남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듯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 할 때 도와줄 가치가 있는 사람과 도와줄 가치가 없는 사람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희생자가 회개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의해 형성되고 따라서 참된 사회적 변혁의 기획에 동참할 능력을 갖춘 사회적 행위자를 만들어 내는 것과 관계가 있다.
P193. 정의가 있는데 왜 용서가 필요한가? 원래의 상태를 정확히 회복시켜 주는 정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편파성의 곤경이 그런 정의의 관 뚜껑을 닫는다면, 불가역성의 곤경은 그 뚜껑을 나사못으로 조인다. 니체가 말했듯이 "어떤 행위도 영으로 돌려놓을 수 없기" 때문에 적어도 최초의 악행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뿐 아니라, 순수한 생각의 영역을 벗어나 구체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의 영역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우리는 원래 가해진 피해보다 훨씬 많은 것이 고쳐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역에는 도저히 보상할 수 없는 피해가 존재하며, 보상을 할 수 있을 때도 어떤 종류의 보상이 적절한가에 관한 논쟁이 일어나 보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보상의 공정함을 논쟁하게 만든다. 엄격한 복원을 추구하는 정의의 틀에서는 화해가 불가능하다. 그러한 정의를 추구할 때 오히려 갈등은 심화되고 '악행을 향한 충동'이 회복되게 만들 뿐이다.
P198. 용서를 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거리, 즉 중립성의 공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공간에서 그들은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고(때로 사람들은 이것을 '평화'라 부른다), 서로의 품에 안겨서 깨어진 사귐을 회복할 수도 있다.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피가 쏟아졌다.' 이런 말들은 갈등으로 무너진 지역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선명한 선이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킨다. 서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깔끔한' 정체성은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는 가능한, 혹은 심지어 바람직한 유일한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은 아직 평화가 아니다. 평화란 단순히 접촉의 부재에 의해 지탱되는 적대감의 부재를 훨씬 넘어서며, 전에는 원수였던 - 심지어 화해하기를 끈질기게 거부하는 - 사람들 사이의 사귐을 뜻한다.
P211. 생각을 통해 과거를 구속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결코 모든 고통을 구속할 수 없으며, 대부분의 시도는 성공적일수록 고통 자체를 정당화하는 (혹은 적어도 용인하는) 듯 보이는 혐오스러운 결과를 낳는다. 생각으로는 "실질적인 악을 이길 수 없으며, 감각적 환영을 이길 수 있을 뿐이다". 고난을 대하는 적합한 반응은 오직 행동뿐이다.
P212. 그러나 과거의 고통이라는 문제에 행동으로 대응하고자 할 떄는, 설령 그 행동이 종말론적 변혁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조차도, 우리는 뒤를 돌아보며 모든 고통이 정당화된다는 불가능한 주장을 함으로써 '의미'를 찾거나, 악의 '무의미함' 때문에 크게 괴로워할 것이다. '무의미함'과 '의미'가 모두 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현재의 고난의 경험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재창조라는 비이론적 행위인 것처럼, 과거의 고난이라는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법도 기억하지 않기라는 비이론적 행위가 아닐까? (중략) 과거에 대한 구속 없이는 최종적 구속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신정론도 성공하지 못했으므로 성찰을 통해 과거를 구속하려는 모든 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망각이 없다면 최종적 구속은 불가능하다. 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대안은 천국 아니면 공포의 기억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다. '만물이 새롭게' 창조될 때 '옛것'이 다 지나가되 그거에 대한 기억까지도 폐기될 때에야 비로소 구속이 완성될 것이다.
P230.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엄밀히 말해 도덕적 입장은 대칭성을 회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주체성의 핵심은 타자가 나에게 다가올지 염려하지 않으며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나와 그 이웃 사이에 세워지는 모든 상호적인 관계 위에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서, 내가 그를 향하여 언제나 한 걸음 더 내딛는 식으로 다가가는 행위다.]
P233. 기본적인 예측 가능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포옹의 무모한 '은총'을 어떤 형태든 상호 구속적인 '율법'으로 보충해야 한다. (중략, 계약은 '율법'에 부합하는 개념인가?) 첫째, 계약은 성과 지향적이다. 계약의 일차적인 목적은 과업을 달성하는 것 혹은 상품을 생산하거나 용역을 공급하는 것이다. 과업을 종료하면 관계도 - 그것이 계약에 의해 규제되는 한 - 해체된다. 둘째, 계약의 특징은 제한된 헌신이다. 계약은 그것이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진술한 것에 대해서만 강제력을 지닌다. 계약은 "다른 곳에서 더 나은 이익을 얻을 수 없을 동안에만" 구속력을 가진다. 셋째, 계약은 엄밀하게 상호적이다. 양측이 동의해야만 양측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다. 바우만의 말처럼, "각자 '의무를 이행해야 할 의무'는 상대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나는 상대편이 또같이 하는 한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계약을 지킬 의무가 있다". 계약의 사회적 유용성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계약이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부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한 '서술적 규범'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비전, 즉 좋은 삶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첫째, 인간은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자율적 개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자아의 표면 아래까지 파고든다. 둘째, 여러 차원에서 서로에 대해 관여하는 경우는 명확히 명시된 항목과 조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이혼의 예가 보여 주듯이, 친밀한 관계의 파기로 초래된 '손실을 보상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웃에 대해 이행해야 할 의무 중에는 이웃이 나에 대해 상응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효화되지 않는 것도 있다. 우리의 관계는 엄격하게 상호적이지는 않다. 이웃이 제공하지 않은 용역에 대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웃이 신뢰를 깨뜨렸을 때 나 역시 그렇게 해도 되는 게 아니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핵심적 은유로서 '계약'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사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들의 삶은 서로 뒤엉켜 있고, 그들의 상호작용은 도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P240. 현대 사회는, 전제적인 정부가 국민과의 언약을 어기는 경향만큼이나 서로 간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력함 때문에도 위협받고 있다. 두 위험은 관계가 있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이 서로 언약을 지키는 능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곧 정부가 국민과의 언약을 어기는 경향과 씨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홉스의 정치철학의 부정적인 교훈이다. 즉, 사회가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자들로 구성될수록, 리바이어던 - 엄격하게 조직되고 중앙 집권적인 국가 장치 - 의 필요성이 더 커진다. 개인주의와 절대주의의 밀접한 연관 관계는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즉, 이 거대한 리바이어던에 저항할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할수록, 사람들은 더욱더 스스로를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 몰두하는 자율적 개인으로 바라보려 한다. "만인이 만인과" 더불어 만장일치로 권력을 이전하는 것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끈질긴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필수적이다. 자기들끼리 언약을 만들고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리바이어던 -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것은 어느 누구와도 언약을 맺지 않는다 - 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리바이어던은 자신의 권력과 힘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만인의 의지"를 만들어 내고, 이로써 "국내의 평화와 국외의 적에 대항하는 상호 원조"를 보장해 준다. 이렇게 부정적 인간론이라는 어둡고 혼란스러운 물로부터 리바이어던이 출현한다. 반대로 언약은 더 긍정적인 인간론을 전제한다. 몰트만이 주장했듯이, 인간과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언약을 맺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인간의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은,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명백한 능력과 짝을 이룬다. 인간은 끊임없이 언약을 만들고, 또 깨뜨린다. 그리고 '만들고' '깨뜨리는' 소동의 이면에는 한 가지 불변하는 인간 조건이 자리잡고 있다. 즉, 인간은 언제나 이미 언약을 깨뜨린 존재로서 언제나 이미 언약 안에 있다.
P254. 규칙에 대한 집착 - 나쁜 규칙이 아니라 유익한 규칙! - 은 자기 의와 다른 사람들을 악마로 취급하는 태도를 부추긴다. 규칙이 계속 작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도덕의 모호함과, 사회적 행위자와, 그들의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축소시켜야 한다.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은, 양극성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양극성을 조장하고, 양극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에서 양극성을 고조시킨다. 그 결과, 한 사람은 전적으로 '안에 있거나' 전적으로 '바깥에' 있게 된다. 둘째 아들(탕자)은 분명히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관계로부터 배제받아 '바깥에' 있다. 모호성과 복잡성을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적절하고 억압적인 배제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첫째 아들의 강력한 자기방어가 표현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심각한 비판이 된다. (중략) 아버지는 이러한 양자택일을 거부했다. 그의 태도를 지배한 것이 하나의 근본적인 '규칙', 즉 관계가 모든 규칙보다 우선한다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방탕하지 않은 아들은 남아서 일을 하고 순종했기 떄문에 선하지만, '규칙'에만 관심이 있었고 동생을 다시 받아들이고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하다. 탕자는 떠났기 때문에 악하지만, 돌아와 잘못을 고백했기 때문에 선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들이 선하고 악한 것과 상관없이 사랑받는다. 따라서 각자의 선함과 악함은 도식적이지 않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평가될 수 있다.
P292. 내부로 눈을 돌려 각 젠더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첫째, 자신의 정체성에만 배타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우월함이라는 파괴적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 더 중요하게는, 내부로 눈을 돌리면 성 정체성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다른 젠더와의 관계를 통해 그렇게 만들어진다. 성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며, 따라서 각 젠더의 개별적 전인성은 다른 젠더와의 관계, 즉 두 젠더를 중성화하거나 종합하지 않고 각 젠더를 다른 젠더에 맞춰 재조정함으로써 협상하는 관계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고전 11:12)
P294. <희생의 논리학>에서 앨리슨 위어는 페미니즘 사상조차도 "정체성과 차이 사이의 비대립적 비억압적 관계를 이론화하는" 데 실패했음을 지적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 2의 성>에서 "정체성은 필연적으로 주체와 객체 간 대립의 산물"이라는 근본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을 객체/타자와 대립시킴으로써만"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관계적 페미니스트들과 포스트모던 페미니스트들처럼 차이의 억압을 통한 정체성 형성을 전복하고자 하는 페미니즘 사상가들조차도 결국에는 암묵적으로 "정체성이 필연적으로 주체와 객체 간 대립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기초한 논증을 전개하며, 따라서 "자아/동일자에 의한 타자의 배제"를 요구하고 있다. (중략, P296) 한 젠더는 다른 젠더를 식민화한 다음 그을린 땅을 버리고 물러나려 한다. 한 젠더는 다른 젠더를 지배하고, 다른 젠더에 경멸적인 이미지를 덧씌우고, 다른 젠더를 조작하려 한다. 한 젠더의 개인은 다른 젠더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며 강요된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결국 공격성으로 변질되고 만다. 대개의 경우 두 젠더의 개인들이 모두 이런 일을 행하며, 심지어는 모두가 동시에 이런 일을 행하기도 한다.
P295. 타자에 대한 순수한 대립을 통해 구성되는 자기 폐쇄적 정체성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여성은 단순히 '남성이 아닌 존재'로 정의할 수 없다. 그런 대립적인 '동일자의 논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의 필연적인 상호연관성"으로부터 형성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정체성에 폭력을 가할 뿐이다. (중략) 성 차이를 삭제함으로써 중성을 만들어 내는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라는' 관념과 달리, 그리고 성 차이를 종합함으로써 역시 중성을 만들어 내는 '이쪽과 저쪽 모두'라는 관념과 달리, '저쪽이 없으면 이쪽도 없다'는 관념은 성 차이를 긍정하는 동시에 하나의 성 정체성을 언제나 다른 성 정체성의 내부에 위치시킨다. 환원할 수 없는 이원성은 보존되며, 각각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언제나 이미 타자를 포함하는 복합적인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2부 링크)
<배제와 포용>, 미로슬라브 볼프, (2) 5장 ~ 7장
< 단상들 > 1. 저자는 진리가 우선이 되지 않으면 세상은 폭력이 지배할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이미 세상은 폭력이 지배하고 있으며, 유사 이래 한번도 진리가 폭력에 우선이었던 적이 없다고도
flyinday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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