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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시

[시] 도망자

날들 2024. 4. 1. 19:28

 




도망치는 게 당연하다
창살이 없으니 도망치는 건 자유
창살이 없으니 도망치는 건 세련

읽다 만 책을 반납할 수도 깔끔하게 지워버릴 수도
네 신발을 신으려다 말고 벗어던질 수도 있다
말 많은 사연들은 매연처럼 치렁거리지만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누굴 붙잡아 세우지도 못한다


도망에 열중하면서, 열중에게서 도망쳤다
손톱으로 시간을 짓이기며 2배속 도망

도망친다 그릇에 담긴 유기물로부터
도망친다 화장실에서 태어난 자식들로부터

반면 어딘가엔 창살에 갇힌 이들이 있고
창살이 있으면 사연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창살이 있으니 도망치는 건 반역
창살이 있으니 도망치는 건 순수
나는 창살을 뚫고 도망치는 개를 보았고
그 순수한 몰두에 경외를 느꼈다


붉은 쇳덩이를 붉게 긁어대다
말 대신 억, 억
발가락이 툭 하고 떨어졌고
그리하여 개는 밤의 가호를 받았다

나는
도망자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캄캄함 속에서
오물과 발자국이 한데 섞인 감옥을 들어내어
내 방에 가져다 놓고 주저앉았다

 
.
(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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