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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휴버트 드레이퍼스 본문

감상/책

<모든 것은 빛난다> - 휴버트 드레이퍼스

날들 2024. 6. 7. 15:21
All Things Shining (2011)


<단상들>

1. 사실 현대의 기독교는 이미 내부를 향해서 꽤나 다신적이다. 수많은 신의 이름이 있다. 창조하는 신, 질투하는 신, 분노하는 신, 슬퍼하는 신, 기뻐하는 신, 파괴하는 신, 회복하는 신, 포기하지 않는 신, 재판하고 처벌하는 신, 시험하는 신, 계획하고 돕는 신... 정말 많다. 기독교는 내부자들이 발견하는 다양한 신의 모습에 그것도 신이 맞다고, 이미 이름을 다 붙여 두었다.(이것이 마냥 바람직하다는 뜻은 아니다.) 외부를 향해 전체주의적일 뿐. 몇몇 이들은 신의 뜻을 인간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랑의 실천보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보인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음받았지만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만을 통해야 하고, 그런데 그 예수는 신성이 육화되어 탄생했단다. 이때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인가, 기독교 교리의 맹점을 봉합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가? 

2. 다신주의 하에서는 모두에게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사회윤리적 의무가 존재할 수 없다. 윤리의 부름을 받은 선택받은 자들이 이를 외면할 수 없을 뿐이다. 대신 윤리의 부름을 받은 자들은 윤리적 행동의 대가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영적 고양감'을 선물받는다. 이때 도덕적 행위가 주는 영적 고양감이란 성적 쾌감과 같다. 매몰되면 위험하지만, 그 가치를 결코 부정할 수가 없으며, 더 나아가 행위의 본질과 분리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고양감의 세계로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응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쾌감을 얻을 수 있는 놀이가 충분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3. 이 책에서 설명하는 '포이에시스적 성스러움'을 위한 '메타 포이에시스'는 곧 중용이다. 자연히 저자는 메타-포이에시스의 판단을 자기 자신의 몫으로 둔다. 그리고 세계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단련하며 판단해야 하기에 메타-포이에시스 역시 '영적'인 과정이라 말한다. 결국 메타 포이에시스는 메타 포이에시스를 통해 판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영적 고양감과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인 또다른 자기 자신의 영적 고양감이며, 영적 행복을 위해 윤리적 위험성을 '감수할 수 있는 것' 혹은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격하시키는 순환논법이다.
 



P34. 위대한 행동들이 이처럼 확고한 까닭은 그 행동이 행동의 담지자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그를 통과해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P59. 슬픔과 상실감은 일종의 현대인의 정조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깊은 질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우리 문화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정조라는 것이다.

P68. 오늘날의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과제란 우리가 의미있게 사는 법을 모른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과제에 대해 충분히 오래도록 초점을 맞출 수 없는 것이 문제다.

P69. 끝없는 농담의 힘은 오히려 가라앉히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 정신을 식게 만들며, 속옷을 적신 채 안락의자에 붙어 있게 한다. 이런 종류의 완벽한 오락거리는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제거해버린다.

P77. 고통이나 권태, 불안이나 분노가 너무 극심한 나머지 그 속에서는 단 일초도 살 수 없게 느껴질 때, 그런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극심하여 살아있는 지옥으로 화할 때, 우리는 달리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을 맞게 된다. 그럴 때는 오로지 현재 주위에 벽을 치고 전적으로 그 속에서만 살 수밖에 없다. 이 권태를 이겨냄으로써만 선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총체적 고통의 선택은 모든 정신 이탈을 막는 일이자 영원한 현재의 기쁨과 감사함 속에서 머무르는 일이다. (중략, P94.) 그러나 이 세계에는 즐거움이 없다. 오히려 무거운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짐이 너무 과한 나머지 어떤 인간 영혼도 완수할 수 없는 책임 말이다. 그것은 신 자신이 한때 행했던 무로부터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무로부터 행복한 의미를 구성할 책임이요, 이를 통해 무의미와 신 없는 세계의 고달픔으로부터 벗어날 책임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신이 되라는 요구나 다를 바가 없다. (중략, P97) 문제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힘든 구원의 상이 관연 매력적인가 하는 데 있다. 그 속에서는 어떤 경험이 다른 경험보다 낫게 보일 여지가 전혀 없이, 모든 경험이 평준화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중략, P98.) 이 견해는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심히 가난한 것이기도 하다. 윌러스는 실존의 "성스러운" 순간들이 선물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에 감사할 이유도 전혀 없다. 성스러움에 대한 윌러스의 관념은 신성함이 개인의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전통적 관념과는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P124. 그리스인들은 성공과 실패, 즉 우리 행동을 우리 자신이 결코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고 있었다.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우리가 해내는 것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끊임없이 반응하고 놀라워하며 감사했다. 즉 성취한 것 전부를 자기 공으로 돌리지 않는 행동을 할 때 우리는 최선의 상태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P139. 진짜 문제는 현상학적인 데 있다. 즉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주장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세계를 경험하고 자기 자시을 이해하는지의 문제가 더 앞선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진짜 쟁점은 신이 원인자인가 아닌가에 있는 게 아니라, '감사'가 과연 적절한 반응인가 하는 데 있다.

P229. 우리는 충분히 자유롭게 우리의 욕망을 단련함으로써 마침내 그 욕망을 유지하고 충족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세계 안에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들에 우리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다는 것이다.

P250.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바친 헌신은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를 향한 것이었다. 그는 베아트리체의 아름다운 초록빛 눈, 사랑스런 입술, 특히 다리에 대해 말하곤 하는데, 그의 전적인 헌신은 이런 것들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단테는 구원의 정조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기독교적 직관의 본질을 포착하고 있었다.

P251. 신의 관조가 주는 축복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지상의 다른 모든 즐거움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P259. 루터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신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중세적 허무주의를 교정할 중심축을 세운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기독교적 정조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즐거움과 감사다. 하지만 이러한 교정의 길은 의미를 희생함으로써 가능했다. 루터는 즐거움과 감사의 정조가 갖는 특수성을 강조한 나머지, 그런 정조가 예수와의 사적이고 개별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개인을 내적인 생각과 욕망으로 정의되는 존재로서 강조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신이 만들어준 위계질서 즉 개인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의 의미들을 희생한 대가였다.

P288. 신적인 아량은 자발적이며 즉흥적인 특성을 가집니다. 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붙드세요.

P290. 신성한 진리란 것이 과연 존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변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완전하고 종결되지 않기 때문에 신적이고 참된 것이다. 그것이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현재의 정조를 통해서만 발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307. 고래에 대한 멜빌의 이해 속에는, 표면적인 사건들 배후에 감춰진 우주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으며, 표면적인 사건들 자체 - 모순되고 신비스럽고 다양한 - 가 의미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어있다. 책 뒷부분에서 말하고 있듯이, "아무리 고래를 해부해 보아도 피상적인 것밖에는 알 수 없다"는 말이 그 뜻이다. 이슈메일의 놀라운 힘은 이런 표면적 의미만을 가지고도 잘 살아간다는 데 있으며, 거기서 즐거움과 안식의 참된 처소를 발견한다는 데 있다. 그는 그 의미들에서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라는 말의 뜻이 바로 이것이다.

P310. 이러한 표면적 삶의 깊이는 가족의 단란한 저녁식탁에서 참된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만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헬레네처럼 아프로디테의 에로틱한 세계에서 의미를 발견해낼 수 있어야만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이런 의미들이 빚어내는 모순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으로도 우리는 그런 깊이에 이를 수 있다.

P312. 기독교 자체는 "모든 사람의 종교적인 의무를 최대한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심지어 그 의무에 참여하는 것을 요구한다. (신의 의지는 타인이 나에게 해주기 바라는 것을 그에게 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가 길을 잃은 것은 그 기본적 방향성 때문이 아니라 전체주의적인 방향 전환 때문이라는 비판이 이 속에 내재되어 있다. 기독교가 자신만이 참된 신앙이라 고집할수록, 그리고 전체적이고 유일하며 초월적인 진리라고 주장할수록 그것은 더욱 고립에 빠질 것이고 공동체 정신을 잃을 것이다.

P325. 만일 우리가 우주의 모든 소리를 단번에 들으려 한다면, 우리는 곧 귀머거리가 될 것이다. 모든 다양한 의미들은 서로를 소멸시킬 것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우주가 감추고 있는 단일한 진리를 듣기는커녕 정신없이 지직거리는 화이트 노이즈만을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색깔을 단번에 보려고 할 때 벌어지는 일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우리는 뭔가 단일한 의미가 있다고 여긴 나머지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찾으려 하지만, 곧 그것을 찾는 일에 미쳐버리게 될 것이다. 보편성이란 귀머거리와 다름없는 것이요, 혼돈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혼돈이 그 자체로 우주의 궁극적인 본성이라 해도, 우리는 단지 그때그때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그런 의미들 각각과 충분하게 관계를 맺는 것이고, 그것들이 계시하는 진리들에 만족해서 사는 것이며, 그것들을 강박적으로 화해시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색채의 스펙트럼 속에서 저마다의 색들이 아름다운 색조를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을 것이다.

P334. 산봉우리든 탑이든 웅장하고 높은 것에는 반드시 자기중심적인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P376. 칸트의 경고 속에는 어떤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 결국 야구장에서 관중과 하나 되어 일어서는 것과, 히틀러의 집회에서 군중들이 하나가 되어 일어서는 것 사이에는 포착하기가 매우 힘든 거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상의 반짝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P379. 불행히도 우리는 호메로스적 다신주의에 내포되어 있는 이런 위험들 사이로 마음 편히 방향키를 틀 수 없다. 호메로스 속에는 마땅히 거부해야 할 요소들도 많다. 그러므로 무작정 그리로 되돌아가자는 요구는 퇴행적인 요구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인 후 영웅적인 광기에 휩싸여 사흘 내내 트로이 성벽 주위로 시신을 끌고 다닌다. 물론 호메로스 역시 이런 악랄한 행동에 박수를 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행동이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에게 끼친 영향만을 기술할 뿐이다. 설령 그 행동에 박수를 보내는 군중들 틈에 우연히 끼였다 해도, 우리는 이런 행동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야만 한다. 위험스럽게도 이런 결정적 지점에서 호메로스는 시신을 묻어주는 쪽을 택하지 않는다.

P388. 세속적 허무주의 시대에서 잘 살아가려면,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이 필요하다.

P391. 테크놀로지가 주는 단조로움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 번째로, 이 단조로움으로 인해 세계는 점점 기술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기예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서 사라질수록 세계는 더욱더 가치의 구분을 잃게 된다. 두 번째는, 세계가 의미를 상실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도 단조로워진다는 점이다. 사물에 대한 애착과 존경의 정조 - 어떤 분야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아는 숙련되고 밀착된 관심 - 는 우리에게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테크놀로지는 우리 자신을 의미의 육성자로 보는 고매한 관념마저 없애버린다.

P394. 가치 있는 분야의 일들에 관심을 갖고, 그 안에서 의미심장한 차이를 드러내는 기예를 육성하는 것이야말로 테크놀로지적인 삶의 방식에 저항하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를 사랑할지 결정하는 일만큼이나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관심가질 만한 가치를 지닌 일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중략) 인간은 자신에 대해 아는 것 이상으로 확장될 수 있는 존재, 즉 세계를 의미심장하게 드러내주는 정조들에 자신을 늘 열어두고 있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 존재의 확장은 무엇에 관심을 가질지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있다는 얘기다.

P399. 정답을 얻으려면 실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만일 내가 원하는 것이 추운 겨울에 몸을 덥혀줄 따뜻한 커피라면, 집안 아늑한 구석에 놓인 히터 곁에서 손에 온기를 전달해주는 컵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최선의 의례가 될 것이다. 이 의례들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 데는 한 가지 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이런 의미 있는 차이들을 분간하려면, 위험과 보상이 함께 따르는 실험과 관찰이 필요하다. (중략) 우리가 이런 기예를 익히고 그것에 걸맞은 환경들을 육성한다면, 우리는 틀에 박힌 일 대신 의식적인 활동을, 진부하고 의미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대신 우리 자신과 주변에 대한 의미 깊은 경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P400. 여기에는 객관적 규칙이 없으므로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만 한다. 우리 마음을 끄는 분야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너무 시시한 게 아닌지, 너무 고립적이거나 너무 따분하지는 않은지, 모든 것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데 부적합하지 않은지, 이 모든 가능성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한다. 헬레네가 그랬듯이, 우리는 그런 세계에 이끌렸던 사실을 후회하고 더 풍요롭고 의미 있는 세계에 이끌릴 수 있도록 스스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런 후회의 위험성은 의미심장한 것들에 결부되어 있는 위험성으로, 그런 위험이 없는 삶이란 무의미와 권태, 무표정과 불안으로 추락하는 삶일 뿐이다.

P403. 우리들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다신주의적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도덕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신들이 우리에게 행동하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왜 이런 부름을 들어야 하고, 그 부름에 유념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다. 하지만 이것이 도덕적 경향을 띠는 것은 피해야 한다. 신들의 부름을 반드시 들어야 하고, 거기에 응답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부름은 단지 우리가 듣고 따르기만을 요구할 뿐이다. 

P409. 첫 번째 제자가 두 번째 제자에게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 있는 많은 빛나는 것들을 보는 법을 배웠지. 하지만 여전히 불행하네. 슬프고 실망스러운 것들 역시 많이 보았기에 스승님의 충고를 따를 수 없다고 느낀다네. 아마 나는 결코 행복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질 수가 없을 것 같으이. 솔직히 말해서 모든 것들이 빛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야." 두 번째 제자는 행복감에 반짝이며 첫 번째 제자에게 말했다. "모든 것들이 빛나는 건 아니라네. 하지만 빛나고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러하지."
 


 
<사랑하는 친구에게>

유독 저번 만남에서 당신은 제가 '일신주의적'이고 당신은 '다신주의적'이라고 강조하듯 말했습니다. 일신주의든 다신주의든 신의 존재든 제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에 당신의 규정이 마냥 달갑지 않았지만, 그 '달갑지 않음'이란 당신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완벽히 이해한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당신이 사용하던 용어에 대한 갈피를 잡은 지금, 저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일말의 거부감도 극적인 놀라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제게도 이 책이 묘사하는 다신론적 면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저희가 서로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를 풀고자 합니다.

1. 복수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며 악행자가 '선량할' 가능성을 주장했던 일은 지극히 호메로스적이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복수의 여신들은 호메로스의 시기에는 올림포스에 의해 지하로 쫓겨났으나 일신주의의 씨앗이 자라났던 아이스킬로스의 고전기 아테네 시기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분노에 따른 처벌과 복수는 결국 상대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어떤 인간도 분노라는 정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당신이 복수를 긍정한다 말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겠죠. 그러나 호메로스도, 이 책의 저자도 분노를 마냥 자라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하지 않을 겁니다. 물론 당신도 분노를 마냥 자라나게 하겠다 주장한 적은 없습니다. 오로지 제 입장이 호메로스적이었다고 말하기 위한 문장이었음을 밝힙니다.

“분노만 쌓인 곳에 공동체는 없다”… 호메로스의 충고[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

《인간의 감정만큼 변덕스러운 것이 있을까? 가까운 사람의 작은 잘못에 화를 내며 등을 돌리지만 낯선 사람의 불행에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인간이다. 이성과 합리성의 신봉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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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신이 "나는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말하자 제가 "그 다음 가사는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자식아" 라고 말했던 일 기억나십니까? 삶에서 슬픔과 상실감 대신 감사를 찾는 태도, 행복에 대한 기준을 낮추는 태도는 호메로스적입니다. 당신이 결핍보다 감사를 느낄 수 있게 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3. "당신의 결론이 제것과 다르더라도 저는 당신이 다음 단계로 갔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니 당신의 방식대로 나아가길 바란다"라고 말했던 날도 기억하십니까? 당신과 제 방식이 '다르더라도' 그것이 당신에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 판단할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당신과 저 사이의 정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저 자신과 외부를 감응시키는 영적인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4. 불륜과 같이 사람 마음이 극단적으로 움직이는 사건은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니 미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으며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고 말하던 제 입장이 싫다고 했죠. 하지만 저는 제 입장이 호메로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호메로스는 파리스 왕자와 도망친 헬레네를 부정하지 않았고, 도리어 에로스에 온전하게 감응한 헬레네를 찬양했습니다. 당연히 불륜은 찬양할 일까지는 못 됩니다.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하지 않고 외부에서 출구를 찾으면서 가정에서는 문제없는 척 현상을 보존하려는 비겁한 이미지를 상상한다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미리 슬퍼하거나 역겨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말이에요. 마음에 계속 두려움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공간이 줄어들게 됩니다. 마음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 점점 희소해지겠지요. 애초에, 저는 사람들이 왜 피해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감정은 당신이 어느 누구든 상관없이 멀리 끌고가는 권능이 있는데 말이에요. 무결한 자신에 취해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뻔뻔한 불륜을 저지르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일신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을만 했던 요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습니다.

1. 제게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 그저 '살아있음'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고 인정한 현재, 그 관심사는 허무주의 사회에서 '윤리적 의무'의 발생가능성을 탐구하는 구체적인 영역으로 넘어갔습니다. 저는 '살아있음'만을 긍정하며 사람은 육체적임과 동시에 영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호메로스적 다신주의도 육체와 영혼의 생동을 주장하며, 이 책의 저자 역시 '메타 포이에시스'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신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악과 고통의 문제가 여전합니다. 다신주의적 태도를 통해 ' 비위를 단련'하여 인생의 모순을 있는 그대로 지켜볼 능력을 갖추더라도 악과 고통을 마냥 내버려 둘 순 없는 일이라고 느낍니다. 설사 그 어떤 윤리를 실천하든 상관없이 악과 고통은 영원할 것이 틀림없더라도 말입니다. 다음 피해자, 혹은 가해자가 바로 저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런 윤리의 요청이 닿지 않고 있으며, 저는 보다 많은 사람이 윤리의 요청을 받길 바랍니다. 따라서 허무주의 사회에서 윤리적 의무의 발생가능성을 탐구하는 일이 제겐 흥미롭습니다.

2. 제겐 '세속적이기만 한 순간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영적인 삶이 주는 '좋음'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지 그 어떤 삶의 태도든 얼마간의 '좋음' 혹은 '옳음'을 지니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세속적이기만 한 순간들'이 현대인에게 피하기 힘든 어려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소 결벽증적인 태도를 갖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또한, 이러한  자신을 설명하며 '나는 생각보다 더 종교적인 사람이다'라고 표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표현이 오해를 낳는다면 '생각보다 더 영적인 사람'으로 수정하겠습니다.

3. 저는 '건강한 삶'을 열망합니다. 제 가장 확고한 판단기준입니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건강한 삶에는 꽤 명확한 기준이 있습니다. 적정체중, 적정혈당, 적정혈압... 뭐든 적당해야 합니다. '건강한 생태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종의 다양성, 해수면 높이, 적정기온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하다는 기준에서 어긋나면 주저없이 잔소리를 하게 되었는데요, 앞으로는 건강함에 대해서 상대방이 삶을 정상적으로 영위하기 힘든 수준이 아니라면 오지랖을 부리지 않아야 할까요? 하지만 건강이란 본래 선순환과 악순환으로 진행되는지라 안 좋은 습관이 또다른 안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 지켜보는 입장에서 조바심이 나게 됩니다. 상대방이 그저 애정어린 조언으로 봐 주면 좋겠습니다만, 조언하는 입장에서 늘 '정상성의 위험'을 유념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상대방이란, 남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삶을 공유하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4. 저는 사치에 민감합니다. 육체적 풍요만을 확장시키고 확장된 풍요를 새로운 기준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책략이 인간이 가진 영적 풍요에 대한 탐색 능력을 잃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이를 강하게 경계합니다. 물질만능주의는 결코 영성을 대체하지 못합니다. 사치에 대해 다소 엄격한 기준을 두는 것은 이러한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가난한 배경으로 인해 검소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소 엄격한 기준을 실행해도 제겐 무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본질에 가까운 즐거움까지도 모두 포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본질과 맞닿아 있지 않은 것을 거부하고, 본질과 맞닿아 있다면 가장 부풀려지지 않은 선택지를 고르려고 고민할 뿐입니다. 결국 사치를 경계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위함이니, 타인의 사치를 제 개인적인 기준으로  비판하며 "더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 운운하진 않아야겠습니다. 국가와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것처럼 느껴지네요.

5. 저는 확신이 있다면 이를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자신들의 취향과 기준에 대해 말할 자격은 (일관성이나 완결성을 확보했는지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취향과 기준이 애정 속에서 맞부딪치는 대화를 좋아합니다. 따라서 명확한 근거로 제 말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존경하며, 그런 이유에서 당신을 존경합니다. 당신은 깊은 허무에 빠진 제게 사소한 육체적 즐거움이 소중하단 걸 일깨워주었습니다. 최근에는 연애프로그램에 대해 의견차이가 있었죠. 결국 저는 당신이 연애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가치가 예술품을 향유해서 얻는 가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음을 납득했습니다.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이의 관점이 문제인데, 대상에 대한 생각이 확고할수록 저 자신의 취향에 대한 주장이 질문보다 앞서는 건 제 입이 가벼워서겠지요. 판단보다 질문을 가까이 하겠습니다.

저는 제가 완전히 '다신주의적'인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만(서두에 말한 것처럼 애초에 관심사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통해 제가 그저 '일신주의적'이라거나 '허무주의적'이라는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은 지금도 당신의 삶을 걱정합니다.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다신주의와 당신이 추구한다던 다신주의가 완전히 같지만은 않다고 느낍니다. 저자는 세상의 반짝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퓌시스적 성스러움'에 더하여 세계와 스스로를 양육하는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퓌시스적 성스러움'에 탄복하는 것만큼이나 '포이에시스적인 성스러움'을 실천하길 바랍니다. (아래에 발췌된 부분 중 300페이지 후반에 해당)

당신의 특정 발언이나 행동이 다신주의적이지 않다고 느껴졌던 적도 있습니다. ( - ) .

...이러한 모습들이 '당신의' 다신주의에 부합한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스스로를 검열하며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순을 없애야만 한다는 강박이야말로 다신주의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를 위해 다신주의를 받아들였는데, 당신에게 다신주의적이지 않은 면모가 보인다면 당신이 그런 행복을 놓치고 있어서가 아닐까요? 저는 이런 가능성을 슬퍼합니다. 이제 저는 다신주의에서 선택이 오로지 스스로에게만 부여된 책임 같은 개념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표현을 바꿉니다. 세상이 당신을 더 이상 몰아세우지 않고 당신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을 선물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당신에게 친절하길. 당신도 세상에 친절을 베풀길.


제가 모르는 제 모습이나, 당신에 대한 오해를 기술하는 일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물론, 굳이 채우지 않아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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