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책

<타인의 얼굴> - 강영안

날들 2023. 12. 10. 15:33
(2005)

죽음이라는 필연에 골몰하며 오랫동안 무의미에 시달렸다. 탁월한 성취도 고귀한 사랑도 답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해 여름, 지금 여기에 살아있음, 그 이상을 바랄 필요나 그 효과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전환이자 인생 최초의 영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그 뒤로도 계속 곱씹어 본 결과, 당시 나의 깨달음에 대한 보다 정확한 서술은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결코 해방되지 못할 것 같았던 나의 허무함과 외로움과 부끄러움도,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인정이었던 것 같다.) 이를 계기로 무기력한 몸을 재촉하여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깨달음으로 즉시 인생의 모든 요소에 대해 새로운 논리가 부여되지는 않았다. 몇 가지를 새롭게 규정해야 했다. 일단 나의 활력을 되찾을 때까지 미뤄둔 작업 중 하나가 바로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윤리'의 성립 가능성을 찾는 일이었다. '나의 성원권이 문제제기되지 않도록 사회적 약속을 어기지 않기'를 '윤리'라고 부르기는 부족했다. '윤리'가 곧 그런 것이라면 '윤리'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는 결국 자기보전의 일환이다. 완벽하게 기능하지 않는 사회(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완벽한 사회 역시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시스템의 구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시스템은 몇 가지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새로운 시스템의 문제를 만든다.) 집단이기주의, 효율만능주의, '행복만능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윤리'는 동력을 잃는다. 행복은 결국 자기 자신의 행복이다. 행복추구가 제 1의 가치라면 결국 타인을 위한 행위는 자신의 행복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만 '건강하다'는 정당성을 얻는다. 행복은 욕망이기에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모든 개인이 평생을 바쳐야 하는 과제다. 행복 실현을 위한 자기 앞가림이 최우선 과제인 사회에서 (애착이 없는) 타인을 위한 행위는 불필요한 '오지랖'에 불과하며, 자기 앞가림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윤리의 채무자가 '되어 주지' 않는다. (혹자는 타인을 위한 행위는 '의무가 아닌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하는 것'이기에 숭고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숭고하게 느낀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타인을 위하는 행위를 유명무실한-의무로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에게 타인을 위한 행위는 분명 의무이지만 자유에 대한 욕망으로 쉽게 회피할 수 있을 뿐이다.) 나, 나의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국경을 넘어서는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이 우리에게 그 책임을 부여하는가? 레비나스 읽기는 이런 고민에 적합하다.


p23. 타자 배제는 나의 '존재'와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데서 비롯된다.

p35. 강자는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고 박탈할 수 있지만 자유 자체를 문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힘없는 타자의 호소를 인정할 때 그때 나의 자유, 나의 실현은 문제시된다.

p37. 타자는 나와 동등한 자가 아니다. 가난과 고통 속에서 있는 타자는 나의 주인이다. 타자를 처음부터 나와 동등한 자로 생각할 때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 경우, 나는 나의 풍요 가운데 남아도는 것을 그에게 나누어주거나 동정이나 반대급부 때문에 그를 도우게 된다.

p38.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이기적인 자기 세계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다. 나의 유한한 존재가 '타자를 위한 존재'로 바뀔 때 죽음의 무의미성과 비극성은 상실된다.

p41. 주체성은 본질적으로 '이기주의적'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기서는 초월이 불가능하다.

p76. 존재론은 언제나 전체성을 지향한다. 또한 인간 자체가 존재론이다. 인간 자체가 곧 존재하는 것을 전체 틀 속에 집어넣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타자는 여기에 동일자 또는 타자에 의해 언제나 지배된다.

p88. 인간이 갖는 불안은 '무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불안'이다. 존재는 그것이 지닌 익명성과 어두움, 인간에게 주는 공포 때문에 문제가 된다.

p91. 잠들지 못하고 깨어 있는 상태는 어떤 무엇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킬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깨어 있는 것이다. 안과 밖,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이 텅 빈 허공만 마주할 뿐이다. 깨어 있음에도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p92.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깨어 있음 그 자체이며 목적도, 내용도, 시작도 끝도 없는 상태이다. 자신을 향해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자의 부재는 레비나스가 말하는 '존재 사건'의 특징이다.

p102. 주체의 출현은 한편으로는 익명적인 '존재 사건'으로부터의 해방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짊어지는 힘겨운 자기 유지의 사건이다.

p104. 이성적 인식은 주체의 고독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주체를 모든 것의 유일한 기준으로 만든다. 유아론 唯我論은 궤변이나 일탈이 아니라 이성의 본질적 구조이다.

p106. 고통은 '무의 불가능성'이다. 존재의 매임으로부터 도무지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 곧 고통이다.

p109. 타자의 존재는 나의 내면성과 구별되는 외재성이고 그야말로 이타성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관계를 '공감'이나 '감정 이입' 또는 '신비로운 연합'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p130. 주체의 주체성은 향유에 기원을 둔다. 향유는 어떤 다른 것을 즐기고 누리는 것이라 볼 때 항상 다른 무엇에 의존적이다.

p131. 요소는 나를 떠받치는 기반이고 그것의 익명성, 무규정성으로 인해 나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힘으로 남아 있다.

p148. 타자의 얼굴에서 나오는 힘은 상처받을 가능성, 무저항성에 근거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얼굴로부터 도덕적 호소력이 나온다.

p166. "책임은 자유에 근거한다"는 의미에서 책임은 나의 삶을 내가 짊어진다는 의미에서 책임일 뿐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윤리적 의미는 책임이 '타인을 위한 책임'일 때 비로소 획득된다.

p167. '자기성'과 '자기 동일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과정이고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제로 주어진다. 여기서 자유는 끊임없는 노력과 투쟁을 통해 쟁취해야 할 과제이다. 나는 나와 나 사이의 거리, 나에 대한 나의 결핍을 통해 내 자신으로 향하는 욕망을 지닌다. A가 A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그저 단순한 논리적 동어반복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A의 A에 대한 불안이다. 주체의 주체성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근심 속에서 자신을 자신으로서 확인하는 일이다.

p169. 나의 존재 실현에 필요한 내용과 질료는 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타자인 세계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나는 세계 안에 주어진 삶을 지탱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들을 욕구한다. 나는 따라서 세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p178. 얼굴은 나의 표상과 인식, 나의 자유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 자체 스스로 드러내 보여주는 타인의 존재 방식이다. 얼굴은 나의 표상과 나의 자유, 나의 주도권의 실패를 뜻한다. 얼굴로 나타나는 타인은 포착하고 이해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을 끊임없이 빠져나간다.

p184. 윤리적 근거로서의 레비나스의 책임 개념은 '타율성'에서 출발한다. 나의 자유, 나의 자발성과 나의 자율적 주도권에서 나온 책임이 아니라 타인의 부름에 직면해서, 그 부름에 응답해서 수동적으로 그 앞에 내가 세워짐으로 인해서 생긴 책임이다.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은 나의 자유에 선행한다.

p189. 부름을 거부하는 일은 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든지, 아니면 다른 일에 몰두하든지, 또는 어떤 핑계와 이유를 제안하는 일을 통해 가능하다. 나는 나의 집 문을 꽁꽁 걸어두고 타인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기중심주의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이 도피를 레비나스는 윤리적 의미의 '악'이라 부른다.

p190. 선을 행하는 일은 존재 질서 속에 속한 거래를 벗어나 있으므로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따라서 선을 행할 때, 선의 결과나 효용성에 대해 물을 수 없다.

p194. 삼자의 등장은 따라서 평등과 공의에 따라 관계들이 조정되는 정의로운 공존 체제 구축을 요청한다.

p195. 국가는 익명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타자의 고유성에 무관심하고 이로 인해 의도와 상관없이 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p196. 이와 같은 상황에는 개인의 양심이 필요하다. 보편 이성의 질서에서 나온 모종의 무질서를 치료하는 데는 주체성의 변호가 필요하다. 주체성의 확인과 변호는 주체성의 이기주의가 성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자아만이 위계질서와 행정 체제의 순작동으로 생긴 타인의 '숨은 눈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p211. 고통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경험이다. 고통 속에는 어떠한 내재적 합목적성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성을 통해서 고통을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p216. 고통은 '너무 많음' '너무 지나침' 또는 '벗어남' 따라서 외재적인 것, 내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낯선 것으로서 '수용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p222. 악마는 분명히 '이성적인' 존재, 즉 목표를 설정하고 계산하고 추론하고 목표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힘과 수단을 가진 자이다.

p232. 타인을 위해서 고통받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름에 내어놓는 일이고 이런 의미에서 지극히 친밀하고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에 일반적 예를 통해 제시되거나 교훈적인 담론으로 얘기될 수 없다. 만약 이것을 일반적 규칙으로 만들어버릴 경우 대속적 고통의 의미를 왜곡시키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다.

p246. 타자를 제어하면서 무한히 자유를 확장하고자 애쓰는 의지와 전체성 속에 개체를 흡수, 환원하려는 의지, 둘 다 문제가 된다. 자유주의와 집단주의는 둘 다 권력 의지로 귀결된다. 권력 의지는 결국 두 경우 모두 구조화된 폭력으로 나타난다.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식을 취하는 정치적 폭력(독재)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무한한 가치를 지닌 인격을 보지 못하고 개체를 전체의 한 부분으로 축소하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Q1. 책임은 정말 (자기보전의) 자유에 앞서는가? 물론 책임은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의 자유를 뚫고 현현하는 권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아닌가. 우리는 결국 선택을 할 수 있다. 존재자의 자유는 본능인 반면, 책임은 필연일 뿐 본능이 아니다. 나는 책임보다 생명체로서 갖는 본능적인 힘이 더 앞선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가능하며, 타인을 위한 행위가 일반적 규칙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인의 얼굴이 나에게 내리는 명령 앞에서 선택하는 것도 오로지 나이고, 책임을 회피했을 때 이를 처벌하는 것도 오로지 나의 양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개인의 양심이 확립되지 않았다면, 도덕적 감수성이 민감하지 않다면 스스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누칼협?" "알빠노?" 같은 말이 유행하는 이유가 있다.) 주체성의 진실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개인은 자신이 얼마나 외부세계에 빚을 지고 있는지와, 존재를 결코 손에 거머쥘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더 노동하고, 더 소유하고, '향유'하려 할 따름이다.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은 레비나스적 주체가 탄생해야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한다. 그렇다면 레비나스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레비나스적 주체의 탄생이 가능한가? 라인홀트 니부어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참고해야겠다.

Q2. 타자는 반드시 고통받는 약자인가? 강자인 타자도 분명히 존재하며, 강함과 약함이 뒤섞여 있는 타자도 있다. 미시적 차원의 선행이 거시적으로는 악행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하지 않을 수 있는가? 선이 승리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이는 그저 존재자의 욕망에 불과한가? 선은 그저 '명맥을 잇는 것'으로 충분한가? 나는 비둘기의 순결과 뱀의 지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대차대조표의 유무 혹은 대차대조표의 흠결을 이유로 개인의 윤리적 수준을 논하는 일은 옳지 않다. 선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대차대조표라도 동원해야 한다는 의미다.

Q3. 존재자의 판단 없이 타자와의 관계가 가능한가? 존재의 익명성 속에서 존재자가 일어서 존재자의 자리를 만드는 것처럼, 타자의 익명성 속에서 공감과 비참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레비나스는 타자의 익명성 속에서는 존재자의 역할을 완전히 부인하고 '신'을 소환한다. 타자에게서 신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까지는 납득이 되지만 존재자의 역할을 완전히 소거하여 종의 위치에 놓는 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주체가 종이 되는 일이 그 어느 상황에서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얼마간 이와 같은 질문들을 품고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