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시

[시] 슬픔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날들 2023. 3. 27. 22:17

행복을 수십 마디로 설명해도
수십 마디 중 선택받는 것은
늘 예상치 못한 빈틈이다
행복이 입을 다물었고
벙어리가 된 생각들이
온몸의 피부를 뚫고 나온다
예를 들어 조끼를 입은 중년 사내가
은행도 달려 있지 않은 은행나무를 흔드는 것을 보면
방금 떨어진 은행잎들의 원래 수명만큼
그 사내의 멱살을 흔들고 싶다
개가 묶여 있을 수도 없어서 팔려가면
그럴 것이었으면 왜 묶어 두었는지에 대해 침을 튀기고 싶다
버섯을 만드는 귀뚜라미 양식장에 가서
귀뚜라미의 몸에 솟아나는 버섯을
하나하나 떼어내고 천한 윤기를 되찾아주고 싶다
몸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빈 술병이라도 줍고 산다
요즘같이 추운 날엔 눌어붙은 술이 얼어
절반은 설탕처럼 깨져버린다
한 마디의 슬픔을 만들고 산다
슬픔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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