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3일(6)
다음 날 아침, 화장터와 매장지로 이어지는 행렬의 선두에서 영정사진을 들어야 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할아버지가 이 땅에 남긴 것들의 대표 역할을 해야 한다니. '장손'의 역할 따위가 존재하는 장례식 절차에 대한 거부감이 치밀었다. 발인 전 가족들이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간이 있었다. 사랑한다, 편히 쉬어라, 가족을 남겨주어서 감사하다. 가족들이 하나하나 나오는 동안 '즐거운 추억들을 선물해주어서 감사하다'라 말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막상 내 차례가 되어 관 앞에 서자 말문이 턱 막혔고, 간신히 '고생하셨습니다' 한 마디를 내어놓고 자리로 돌아왔다.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단어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아픔과 무딤이 당황스러웠다.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고 나를 칭찬했다.
영정사진을 받아들고 선두에 섰다. 가족들의 시선과 카메라 렌즈를 애써 무시하기 위해 가슴께의 할아버지를 꼭 붙잡았다. 교회에 갈 때 할아버지를 부축해 차에 태우던 기억을 떠올리며 선두 차량에 올라탔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집을 지나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나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개척하다시피 한 교회를 지나쳤다. 그렇게 동네를 지나쳐 화장터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과 떨어진 좁은 공간에서 고요하게 실려 가는 감각이 슬픔을 부추겼다. 목구멍 깊은 곳이 뜨거웠다. 그러다 문득 차를 운전하던 둘째 고모부가 최근 근황을 물어왔을 때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리 울고 싶어도 울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할아버지의 유산일까. 차 안에서만큼은 맘껏 슬퍼지고 싶어서, 푹푹 주저앉는 슬픔을 몇 번이고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화장터에 도착하자 상을 당한 다른 사람들이 많았다. 2시간 정도 차례를 기다린 후에야 우리 가족의 차례가 돌아왔다. 할아버지의 관을 불길 속으로 넣을 때 여전히 난 맨 앞이었고, 아버지가 바로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직원들이 할아버지의 뼈를 적당히 빻았고 아버지는 단지를 들고 다시 내 뒤를 따랐다. 매장지로 갈 때는 아버지도 선두 차량에 합류했다. 뒷자리에 앉은 아버지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가 차 안에서 맘껏 슬퍼하길 바랐다.
장례 행렬은 밭에 도착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형이 묻혀 있는, 그리고 이제 할아버지가 묻힐 가족 묘가 밭에 있다. 이 역시 할아버지가 준비한 것이다. 우리 가족은 매년 봄마다 이 가족 묘 앞에서 모임을 가져 왔다. 이제 할아버지도 자신이 원했던 대로 이곳에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고향과 혈육을 상징하게 될 것이다. 남자 어른들이 묘를 파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면 가까이에 묻혀 있어야 할 관의 출입구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묘를 파헤치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람들이 이 순간을 위해 모아 두었던 슬픔이 새 나가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그늘에 모여 잡담을 시작했고 마침내 오랜 시간이 흘러 봉분 깊숙히 묻힌 관이 그 입구를 드러냈을 때 몇 명은 작은 탄성을 질렀다. 해가 지기 전 급히 마지막 예배를 드렸다. 가족들은 모두 담담해졌고 내 품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활짝 웃고 있던 할아버지는 그제서야 묘에 들어가 누웠다. 마치 이렇게 하면 우리의 슬픔이 덜어질 것 같아 계획했다는 듯이.
(1810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