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발터 벤야민

이 글이 '현대'라고 지칭하는 시기는 1939년이다. 당시 예술의 최전선엔 영화가 있었다. 그러나 2025년이 된 지금 영화가 1939년만큼의 반동적 힘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생긴다. 2025년에 이 글을 다시 적용할 때는 [영화]의 자리에 게임이나 SNS, 유튜브, 틱톡 같은 더 속된 매체물을 넣어 볼 수 있다. 틀이 꼭 들어맞지 않는다면 2025년에는 어떤 이론을 적용해볼 수 있을까.
전세계에 전운이 감도는 탓에 전쟁의 원리나 속성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 글에서 전쟁에 대한 통찰을 찾았다. 벤야민이 너무나도 명석했기에, 호모 사피엔스 출현 이후 인간은 지능 면에서 하나도 발달하지 않았다는 과학적 주장이 떠올랐다.
공산주의적 방법인 "예술의 정치화"가 벤야민이 지지하는 파시즘 대항법이라는데, 이 책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없어 이에 대한 사유가 담긴 벤야민의 다른 글을 찾아보려고 한다.
P26. 역사의 광대한 시공간 내에서는 인간 집합체들(현실태로서 존재하지는 않지만 '집합적 무의식' 속에서나마 계급 없는 사회의 경험들을 담지하고 발전시키는) 의 존재양식이 총체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인간의 지각양식도 변한다.
P30. 현대의 대중은 대상들을 공간적으로 또는 인간적 관심을 끄는 쪽으로 '더 가까이 접근시키는' 것을 매우 열렬한 관심사로서 삼는 동시에,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의 복제를 손에 넣음으로써 주어진 것의 유일무이성을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는 대상들의 사회적 지위와 직능을 시야에서 제거해버리게끔 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P33. 예술작품의 아우라적 존재방식이 그 제의적 기능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일은 결코 없다.
P52. 영화배우의 연기는 관객에게 기계장치를 통해서 제시된다. 이는 두 가지 귀결을 낳는다. 영화배우의 연기를 관객 앞으로 가져다놓는 기계장치는 이 연기를 통일적인 전체로서 고려할 필요가 없다. 기계장치는 카메라맨의 지휘 아래 계속적으로 이 연기에 대해 위치를 변경해간다. (중략) 따라서 영화배우의 연기는 일련의 시각적 텍스트를 따르게 된다. 두 번째 귀결은 영화배우가 자신의 연기를 직접 스스로 관객에게 내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무대배우에게 남겨진 가능성, 즉 공연 중에 연기를 관객에 맞춰가는 가능성을 상실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 때문에 관객은 배우와의 그 어떤 개인적 접촉에으로부터 방해받지 않는 감식자의 태도로 접어들게 된다. 관객은 기계장치에 감정이입이 됨으로써만 배우에게 감정이입이 된다. 그러므로 관객은 기계장치의 태도를 넘겨받아서 직접 테스트하는 것이다. 이는 결코 제의적 가치들로 환원될 수 있는 태도가 아니다.
P55. 피란델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영화배우는 이런 기계장치 앞에서 자신이 추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무대로부터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격으로부터도 추방되어 있는 듯한. 그는 정체모를 불쾌감과 더불어 형언하기 어려운 공허를 느끼는데, 그 원인은 그의 몸이 결락缺落 증상을 겪는 점에 있다. 즉 그 자신이 휘발되어버리고, 또한 그의 현실, 그의 삶, 그의 음성 그리고 그가 몸을 움직이는 데에 따른 소리 모두를 빼앗겨서, 말없는 하나의 영상이 되는 것이다. (중략, P56) 인간은 분명 자신의 살아있는 인격 전체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제 최초로 - 이것이야말로 영화의 작용이다 - 이 인격의 아우라를 포기하는 가운데 활동해야만 하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왜냐하면 아우라는 인간이 '지금-여기'에 있는 것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P62. 영화계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깥에 인위적으로 '유명인personality'을 만들어낸다. 영화자본에 의해 스타숭배가 장려됨에 따라 유명인[의 인격]이라는 저 마력이 - 물론 이 마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격의 상품적 성격이라는 부패한 마력 속에 존재했다- 온존되고 있다. 영화자본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에서 오늘날의 영화로부터 일반적으로 기대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기능은 전통적 예술관에 대한 혁명적 비판의 추진뿐이다.
P69. 영화가 갖는 환영적 성격이란 이차적으로 획득된 것이다. 그것은 필름편집의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영화촬영에서 현실을 순수하게 비추어내는 시점Aspekt, 즉 기계장치라는 이물질로부터 벗어난 시점이란, 어떤 특수한 처리- 이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카메라로 촬영한 것과 다시 같은 종류의 다른 촬영필름과 합쳐서 몽타주한 것 - 의 결과로 생겨난 것인바, 영화스튜디오에서는 이러한 식으로 기계장치가 현실 속에 깊이 침투되어 있는 셈이다. 기계장치로부터 해방된 듯한 현실감 넘치는 영상 자체가 실은 가장 인공적인 것이 되어 있다. (중략, P73) 영화에 의한 리얼리티의 표현 쪽이 오늘날의 인간에게 회화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 되어 있는 것은, 이 영화의 리얼리티 표현이 바로 현실과 기계장치 간의 극히 강력한 상호침투에 의거함으로써 기계장치조차 더 이상 제약이 되지 않는 그러한 현실 파악의 시점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P86. 침잠Versenkung(자신이 신과 혼자 대면하고 있다는 의식)의 태도는 시민계급의 퇴화과정(개개인이 신과의 교류에 기울이는 힘을 공동사회의 사안으로 돌리려고 하는 은연중의 풍조)에서 비사회적 태도의 하나의 온상이 되었는데, , 이에 대항하는 사회적 태도의 한 변종으로서 등장해온 것이 정신분산Ablenkung(기분전환)이라는 태도이다. 다다이스트들에게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우선 공공의 분노를 유발시키도록 하라는 하나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다다이스트들에게서 예술작품은 그 매혹적인 외관이나 마법적인 음향에서 벗어나 하나의 포탄으로 변해버렸다. 그것은 관중들에게서 떨어졌다. 말하자면 촉각적 성질을 획득했다. 이 점이 영화에 대한 수요를 동시에 조성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영화의 정신 분산적 요소도 주로 촉각적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장면이나 화면의 빠른 전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는 관객을 향해 간헐적으로 엄습해온다. 뒤아멜은 이러한 사정을 메모로 적고 있다.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나는 이미 더 이상 생각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바뀌어가는 영상들이 내 사고의 자리를 빼앗아버렸다." 여기에 영화의 쇼크효과가 있으며, 이것은 다른 모든 쇼크효과와 마찬가지로 고도의 신경집중에 의해 추슬러야 한다. 영화는 그 기술적 구조가 지닌 힘을 통해, 말하자면 다다이즘이 정신적인 틀 속에 포장해두고 있었던 생리적인 쇼크효과를 이 틀로부터 해방시켰다.
P89. 영화는 현대인이 점점 더 많이 직면하고 있는 삶의 위험Lebensgefahr에 딱 들어맞는 예술형식이다. 쇼크효과에 몸을 내맡기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이 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에 적응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P92.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은 작품 속으로 자신을 침잠시킨다. 이에 반해 정신을 분산시킨 대중은 거꾸로 자신들 속으로 예술작품을 침잠시킨다.
P94. 역사의 전환기들마다 인간의 지각기관이 직면하는 과제는 단순한 시각적 수단들, 즉 관조를 통해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촉각적 수용으로부터, 즉 습관화를 통해 점차 해결되는 것이다. 정신을 분산시킨 사람도 습관을 형성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신을 분산시킨 상태에서 어떤 과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이 과제의 해결이 그에게 습관화되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이다. 여기에서, 예술에 의해 제공될 수 있는 정신 분산을 단서로 삼는다면, 지각의 새로운 과제의 해결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개인은 이러한 과제의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다. 따라서 예술 자체가 그 가장 곤란하고 중대한 과제의 해결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는 특히 예술이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장소에서 일어난다. 오늘날 예술이 그것을 행하는 곳은 영화이다. 그리하여 영화는 제의적 가치를 뒷전으로 물러나게 하는데, 이는 단지 관객에게 감정인의 태도를 취하게끔 한다는 점에만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관 내의 이 감정인의 태도가 어떠한 주의집중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정에도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은 말하자면 하나의 시험관Examinator이되, 정신이 분산된 시험관이다.
P96. 현대인의 급증하는 프롤레타리아화와 대중의 광범한 형성은 동일한 사태의 두 측면이다. 새로 생겨난 이 프롤레타리아 대중은 현 소유관계의 철폐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파시즘은 소유관계에는 손을 대지 않고 대중을 조직하려 하고 있다. 이때 파시즘은 대중에게 표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는 대중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을 축복된 일로 간주한다. 대중은 소유관계를 변혁시킬 권리를 갖고 있다. (특히 주간뉴스영화가 갖는 프로파간다적 의의를 고려한다면, 여기에서 어떤 기술상의 사정이 중요해진다. 대량복제에는 특히 대중의 복제 재생산이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대규모 축제행렬이나 거대 집회, 대중적 스포츠대회 그리고 전쟁, 이들 모두는 오늘날 촬영장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또 보급되는 것들로서, 바로 여기에서 대중은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반면 파시즘은 소유관계를 온존시킨 채 표현의 기회만을 그들에게 주려고 한다. 이로써 파시즘은 그 당연한 귀결로서 정치생활의 미화로 귀착된다. 파시즘은 영도자 숭배를 통해 대중을 굴복시키고 있지만, 이와 같이 대중을 힘으로 억누르는 것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제의적 가치를 조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매스컴 기구를 장악하는 것이다. 정치의 미화(파시즘에서 보이는 정치적 표현의 효과적인 장치들인 공공 연설, 퍼레이드, 스포츠대회 등)를 위한 모든 노력은 하나의 정점에 도달한다. 이 정점이란 전쟁이다. 전쟁은, 그리고 오직 전쟁만이 종래의 소유관계를 유지한 채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에 하나의 목표를 부여할 수 있게끔 한다. 정치의 측면에서 사태를 본다면, 방금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또한 기술의 측면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전쟁만이 소유관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현재의 모든 기술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물론 파시즘에 의한 전쟁 찬미는 이와 같은 논거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논거에 주의를 기울여두는 것은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에티오피아 식민지전쟁에 대한 마리네티의 선언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27년 전부터 우리 미래주의자들은 전쟁을 미적이 아닌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반대해왔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방독면이나 위협용 확성기, 화염방사기나 소형 탱크를 통해 기계를 굴복시키고, 기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인간의 육체를 강철로 무장하는 꿈이 비로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기관포가 내품는 화염의 난으로 장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총성과 포성, 죽음의 정적, 방향과 썩는 냄새를 하나의 교향악으로 통일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대형전차나 비행편대가 그리는 기하학적인 도형,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나선모양 등 새로운 구성의 미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 미래파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전쟁미학의 이러한 근본원리들에 유의한다면, 새로운 시문학이나 새로운 조형을 구하는 우리의 고투는 그 원리들로부터 찬란한 빛을 받을 것이다." 이 선언문은 명료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 문제설정의 방식은 변증법적 사상가도 계승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변증법적 사상가에게는 오늘날의 전쟁의 미학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즉 생산력의 자연스러운 이용이 소유 질서에 의해 지장을 받게 되면, 기술적 수단, 속도, 에너지자원의 증대는 생산력의 부자연스러운 이용 쪽으로 내몰린다. 이 부자연스러운 이용의 장은 전쟁에서 얻어진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파괴행위를 통해서, 사회가 기술을 자신의 기관으로 삼을 정도로는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기술 역시 사회의 근원적 힘들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셈이다. 제국주의 전쟁의 극도로 끔찍한 특징들을 규정하고 있는 것은, 강력한 힘을 지닌 생산수단들과 이것들을 생산과정에서 충분히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 사이의 불균형 (달리 말하자면 실업, 판매시장의 부족)이다. 제국주의 전쟁은 기술의 반란이다. 자연자원을 제공하라는 기술의 요구를 사회가 거부했기 때문에, 기술은 '인적 자원'에서 그 징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은 이제 하천의 치수공사를 벌이기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쟁 참호 속으로 향하게 하며,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기보다는 도시들 위에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그리고 기술은 독가스전을 통해 아우라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거하는 수단을 발견하고 있다. "예술에 영광 있으라, 세상이 망할지라도"라고 파시즘은 말한다. 파시즘은 마리네티가 공언하고 있듯이 기술에 의해 변화된 지각을 예술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전쟁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예술을 위한 예술의 완성이다. 일찍이 호메로스에게는 올림포스 신들의 구경거리 대상이었던 인류가 이제는 인류 자신에 대한 구경거리 대상이 되었다. 인류의 자기소외는 자기 자신의 파멸을 최고의 미적 향유로서 체험하는 그러한 극점에 도달했다.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미화란 이러한 것이다.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
P138. 최근의 디즈니 영화에서 명확해지는 경향은 실제로는 종래의 많은 영화들에서 이미 그 기초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즉 잔인함이나 폭력행위를 마치 인간존재의 부수현상인 것인 양 호기롭게 묵인해버리는 경향이 그것이다. 이리하여 아주 오래되었으나 결코 신뢰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셈이다. 이 전통의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박해를 묘사한 중세의 회화들에서 보이는 저 춤추는 불량배Hooligans들이다. 그리고 이 전통의 맨 뒤를 이루고 있는 것이 그림형제의 동화 속 '악당들'이다.
P140.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각양각색의 강조를 통해 눈길을 끌고 있는 정신분산적 수용 가운데에는, 광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중재요인들 중 하나가 들어 있다. 사람들은 예술의 중요한 요소들과 자본의 의도 간의 융합을 추적할 수 있다. 정신분산된 개개인들로서의 대중에게 호소하고 있는 광고에서는, 예술이 하나의 선례를 향한 상업적인 검토를 수행한다. 그 경우 선례를 좇아 예술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 더불어 인간의 혁명을 이루어낼 것이다. 그것은 바로 대중들에 의한 예술 수용이라는 선례이다. 이 점이 뜻하는 바는, 광고와 예술 간의 원칙적 경계들을 고정하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라는 점이다. 이에 비해 훨씬 유익한 것은, 예술생산의 극단적인 형식들, 가령 예배 이미지와 광고 이미지를 서로 대면시키고 서로 영향을 갖게끔 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예술작품 앞에서 주의를 집중하는 자의 태도는 언제나 종교적 태도로 귀환되지 않을 수 없는 데 반해, 정신이 분산된 대중의 태도, 즉 자기 자신으로부터 예술작품을 작용케 하는 대중의 태도는 언제나 그 정치적 태도에 의해 인간 자신에게 어울리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과거 언젠가 예배 이미지 앞에서 그러했듯이, 광고물 앞에서는 더 이상 예술애호가도 또 편협한 무취미자도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