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서의 불교> - 마크 시더리츠 / (1) 1장~3장
내가 가장 신뢰하기 어려운 불교 교리는 재생(윤회)인데,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이 허상이라는 가설과 평행우주 가설에 대한 업데이트를 따라가다 보면 재생 이론이 과학적인 근거를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흥분감이 든다.
그 외엔, 이미 많은 부분을 믿고 있으며 그 많은 부분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다. 불교적 사고는 내 영적 경험에 부합할 뿐 아니라, 그 이후로 내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믿음과 감정을 꼭 의심해 보는 편이라(틀리는 것의 민망함, 틀렸을지 모른다는 조바심보다 답을 발견하는 기쁨이 커서) 충실히 작성된 반대 진술 역시 흥미롭다. 이 책에 불교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철학적 반론들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한 점이 좋았다.
<용어들>
- 붓다 : 이름이나 별칭이 아니라 지위다. 붓다는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및 그 치료에 관한 사실을 독자적으로 발견하고는 이를 세상에 가르친 사람이다.
- 석가모니: 석가족의 성자
- 보살: 깨달을 운명의 존재로 아직 붓다의 지위라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
- 열반: 괴로움의 소멸, 꺼짐. 즉 끊임없는 재생의 종결이자 깨달음.
- 초기불교: 붓다와 그 직제자들의 가르침
- 아비달마: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에서 성장한 엄격한 형이상학적 및 인식론적 이론의 발전
- 대승(Mahayana): 불교 형이상학과 인식론은 어떠해야 하는지 대안적 설명과 더불어, 아비달마적 교리 측면에 대한 철학적 비판
- 사성제: 네 가지 고귀한 진리.
- 고제(duhkha): 괴로움(혹은 뜻대로 되지 않는 불편감)이 있다. 자신의 필멸성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소외와 절망.
- 고고: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
- 괴고: 비영속성으로 인한 괴로움. 상실에 대한 불안
- 행고: 조건(재생)으로 인한 괴로움. 재생의 원인이 된다고 알려진 요소(행위를 동기부여하고, 업의 결과를 초래하는 의도 또는 의지)
- 집제: 괴로움의 기원이 있다. 괴로움은 원인에 의존한다. 원인을 학습하면 그 현상을 통제할 수 있다.
- 멸제: 괴로움의 종식이 있다. 괴로움은 막을 수 있다.
- 도제: 괴로움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 있다.
- 팔정도: 여덟 가지 수행의 길(도제)
- 정견(바른 견해), 정사유(바른 의도) : 지혜
-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생계수단) : 도덕성
-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마음챙김), 정정(바른 집중) : 명상의 상호작용
- 십이연기: 열두 가지 원인(집제)과 결과의 사슬. 후자가 전자에 의존하여 발생. 무지 역시 최초의 시작이 아닌 무지 역시 이전 삶에서 일어난 이전 조건의 결과. 무지가 괴로움을 낳는 데 핵심 역할을 하기에 가장 먼저 서술.
- 무지(무명. 삼법인에 대한) > 의지(행. 업의 능동적 힘) > 의식 > 신체 > 감각(육근) > 접촉 > 느낌(수. 중립의 느낌이라는 쾌와 관련된 상태) > 욕망(애) > 전유(upadana. 어떤 것을 '나'의 것으로 취하는 태도) > 생성(의지+신체) > 태어남 > 늙음과 죽음
- 삼법인: 실재의 세 가지 특징.
- 무상, 고, 무아
- 오온(skandha, 묶음): 색(rupa), 수(feeling), 상(perception), 행(volition), 식(consciousness)
- 색: 물리적인 모든 것. 이외의 네 가지는 명색(nama-rupa, 일종의 심신 이원론)
- 수: 즐거움, 고통, 그리고 중립느낌
- 상: 지각 가능한 대상의 감각적 특징을 파악하는 정신적 사건. 파란색 부분을 파랗다고 보는 것
- 행: 의지. 배고픔, 주의력 등 신체 및 정신활동의 원인이 되는 정신적인 힘
- 식: 신체 및 정신 상태에 대한 알아차림
- 오컴의 면도날, 혹은 가벼움의 원리: 관련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똑같이 훌륭한 두 개의 경쟁 이론이 주어지면, 더 가벼운 이론, 즉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의 수를 가장 적게 상정하는 이론을 선택하라.
- 비재귀성 원리(Irreflexivity Principle) : 존재자는 그 자신에게 작용할 수 없다.
- 귀류법(reductio ad absurdum) : 먼저 어떤 진술이 참이라고 가정한 뒤, 그 가정으로부터 불합리한 결과를 추론해냄으로써 이 진술이 거부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 환원주의: 한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으며 그 존재는 단지 다른 종류의 사물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일 개념과 불교의 재생(윤회)
- 사구부정(catuskoti) : 정립(定立), 반정립(反定立), 긍정종합(肯定綜合), 부정종합(否定綜合)의 답을 제시하고 이를 반복하여 부정하는 불교의 문답법
-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 어떤 논증이 결론을 전제 중 하나에 몰래 들여올 때 범하는 오류
- 불요의경: 의미의 해석이 필요한(neyartha) 경전. 세속적 진리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진술
- 요의경: 의미를 "완전히 끌어낸"(nitartha) 경전. 궁극적 진리의 진술
- 소멸론: 내가 지금 존재하는 동안, 현재 나를 구성하는 부분이 소멸하면 나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다른 누군가로 대체될 것
- 단멸론(Punctualism) : 인격체는 죽을 때가 아니라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갈 때 사멸한다고 주장하는 소멸론의 한 형태. 개별 온들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 또 새롭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온이 대체되어야 하는지에 인격체 개념이 달려 있다는 견해. 일생 동안 존속하는 인격체는 없음.
- 유여열반: 남는 것이 있는 종식. 현재의 생을 지속시키는 잔여의 업
- 무여열반: 남는 것이 없는 종식. 사후의 열반
- 삼독(klesas): 윤회(samsara)에 얽매인 채로 머무르게 하는 요인. 삼독은 특정한 행위들에 동기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고, 다시 이 행위들은 삼독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음.
- 탐욕(탐): 무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행위
- 증오(진): 무지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행위
- 망상(치): 삼법인에 대한 무지
P33. 구원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독실한 믿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열반은 세계의 본성에 대한 합리적 탐구를 통해 달성된다. (각주) 이는 불교는 철학이지 종교는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성과 신앙 사이에 엄격한 이분법이 있다고 가정하는 셈이다. 불교도들은 그러한 가정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구원론적 문제에 대한 이들의 태도와 오늘날 과학적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비교하는 게 유용할 수도 있겠다. 우리 대부분은 물리학 같은 더 고등한 과학 이론을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적절한 훈련을 받는다면, 이러한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스스로 평가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P37. 업(karma)과 재생(rebirth)의 교리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몇 가지 혼동을 해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불교도들의 이해처럼, 업은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이 아니라는 점이다. 업의 법칙은 기본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동기에서 행위하면 즐거운 결과를 받고, 악한 의도로 행위하면 괴로운 결과를 받는다는 점과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는 그렇다면 누가 선과 악을 결정하는지 질문하게 만든다. 불교도에게는 이런 결정을 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정답이다. 업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간단히 설명하는 일련의 비인격적인 인과법칙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업의 법칙은 과학이 조사하는 소위 자연법칙과 꼭 닮아있다. 아무도 이 법칙을 통과시키지 않았고, 누구도 이 법칙을 집행하지 않는다. 업의 법칙은 복종하거나 위반할 수 있는 규칙 같은 게 아니라, 뒤따르는 것을 항상 예외 없이 일반화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P38. 업과 재생을 바라보는 불교의 태도에 대해 두 번째로 지적해야 할 점은, 재생에 대한 믿음이 여타의 여러 종교 전통 내에서 내세에 대한 믿음이 하는 역할과 같은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은 뒤 다시 태어나리라는 사실은 안도나 위안의 원천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 수행의 요점은 즐거울 다음 생을 보장하거나 괴로울 다음 생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붓다는 계속 이어지는 재생이야말로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 다시 태어남은 다시 죽음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P39. 재생과 업의 교리에 대한 세 번째 요점은, 이 교리가 불교에만 있었던 견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붓다 이전부터 영적 교사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대부분의 인도인들에게 있어 세상의 상식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 종교란 신앙에 기대어 반드시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주장을 하는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이미 이 같은 주장이 상식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도들이 재생의 교리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불교가 신조라는 의미에서 종교, 즉 증거 없이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련의 교리라는 점을 보여주지 못한다. 어쩌면 인도인들은 타당한 증거 없이 이 교리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 해도, 이들이 불교도로서 수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업과 재생의 교리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업과 재생의 교리는 우리 기준으로 상식적 세계관이 아니다. 그래서 이 교리가 사실이라는 증거가 무엇인지 묻는 건,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탐구하고 있다면, 합당한 태도일 것이다.
P70. 철학을 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불교도들은 대개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대한 근본적인 가정, 즉 나와 내가 원하는 것은 무한정 계속 존재할 수 있고, 세속적인 목표를 추구함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으며, 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소유하는 진정한 "내"가 존재한다는 가정들을 살펴본다면 왜 그런지 알 수 있다. 우리의 활동 대부분은 이런 가정들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이를 강화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철학적 실천을 통해 이 가정들이 틀렸다고 알게 될지라도, 그 뿌리를 뽑는 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악순환을 끊고서 철학을 통해 획득한 지식을 명확히 깨달으려면 명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P73. 무상과 무아는 괴로움에 대한 주장과 무슨 관계가 있을가? 여기서는 무상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같은 설명 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이 욕망하는 것들이 영원하다고 잘못 믿어, 그것들에 애착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것들이 소멸하면서 무상함이 드러날 때 괴로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상이라는 사실을 꼭 간직한 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해결책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사물에 집착하는 짓을 버리고 이 순간을 사는 법을 배울 때 괴로움은 사라질 것이다. 삼법인에 대한 이 해석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틀렸다.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이해하는 열쇠는 무아의 진리다. (중략) 우리는 현재에 살라는 충고를 받는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보통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핑계로 그 미래 자아의 이익을 반영해 이 현재 자아가 무엇을 할지를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교가 이런 식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이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는 분명 양립할 수 없다. (중략) 불교도가 의미하는 "괴로움"은 무엇보다도 실존적 괴로움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존적 괴로움은 가치와 의미의 잠재적 담지자의 역할을 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괴로움은 자신이 원하는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없을 것 같다는 - 행복을 얻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 막연한 느낌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괴로움을 경험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좌절이 스스로 부여한 존재의 존엄성을 모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일생을 구성하는 경험은 존재하지만, 그러한 경험에는 소유자가 없다는 점을 보여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나"도 없고, 경험을 하는 경험자도 없다. 이럴 경우, 내 삶이 나에게 고유하게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있으리라는 확신은 착오에 근거하는 걸로 드러날 것이다. 내 삶의 경험이 의미 있으려면 경험과는 별개로 좋은 의미나 나쁜 의미 같은 걸 소유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독립된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실존적 괴로움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불교도들이 무지의 핵심으로 여기는 것은 자아에 대한 그릇된 믿음이다.
P79.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진정한 지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거기에 소위 해탈의 역설이라는 게 발생한다. ①해탈은 본질적으로 욕망할 만한 것이다. ②이기적 욕망은 해탈의 획득을 가로막는다. ③해탈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기적 욕망 없이 살도록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④행위의 예견된 결과를 욕망하지 않는 한, 이를 위한 의도적 행위에 매진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해탈을 얻으려면 해탈을 욕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①은 해탈을 욕망하는 게 합당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②가 반대로 해탈을 욕망한다면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한다는 데 있다. (중략, P80) 해탈의 역설을 푸는 데 쓸 수 있는 다른 전략들이 있다. ①을 부정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왜 해탈을 얻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제기될 것이다. 아니면 해탈에 대한 욕망이 이기적 욕망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①이 사실이라면 이는 믿기 어려워 보인다. 해탈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이를 얻으려는 나의 바람은 분명 나를 이롭게 하려는 욕망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렇지만 ②를 적용하는 문제와 관련해 그러한 모든 욕망이 이기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의 문제점은 욕망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강화하는 데 있다는 걸 기억해 두자. 해탈이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에 대한 사실과 상충하지 않는 방식으로 즐거운 것이라면 어떨까? 설사 이게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는 이러한 지복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세속적인 용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이를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는 결국 그릇된 방식으로 -②가 해탈의 획득을 가로막는다고 말한 방식으로- 해탈을 욕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실현 가능한 전략을 시사하고 있다. 즉 ①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욕망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도할 수 있기 때문에 ①을 부정하라는 전략인 것이다. 이는 해탈의 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라, 해탈하는 것이 고통과 괴로움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지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점을 목표로 삼지 않고도 해탈의 지복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은 단지 고통과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간접적인 전략이 통한다고 알려진 상황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면서 자애롭게 행동할 때 얻게 되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생각해 보자. 만일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나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궁극적인 목적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계산된 전략의 일환이었다면, 나는 결코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느낌을 목표로 삼아서는 그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좋은 느낌을 바라는 사람에게 해줄 최선의 조언은 타인의 안녕을 진심으로 걱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P82) 열반은 괴로움의 영구적 종식처럼 주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는 사실과, 유여열반에 대한 긍정적인 언급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이러한 태도가 전략적으로 선택된 것임을 나타낸다. 어쩌면 유여열반이 진정한 행복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는 세속적인 행복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업과 재생의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붓다의 길이 이치에 맞으려면 이런 해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만약 재생이 없는데다 붓다가 자아는 없다고 한 말도 옳다면, 내가 죽은 뒤에는 깨달음을 얻든 얻지 못하든 어떤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여열반에는 괴로움이 없다는 말로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동기가 내게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내게는 유여열반, 즉 여전히 살아 있지만 깨달아 있는 상태에 대한 사실이 동기가 될 것이다. 만약 실존적 괴로움의 부재가 깨달음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거라 생각되는 전부였다면, 깨달을 가망이 있는지 계산해서는 세속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깨달음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이 내가 이를 추구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P86. 불교도들이 의미하는 "자아"는 한 인격체의 본질(essence)이다. (중략, P88) 자아란 지금 존재하는 인격체가 이전에 존재했던 누군가와 동일한(수적인 동일성) 인격체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중략, P89)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아는 "나를 나로 만드는 것", 즉 "나에게 나의 동일성(identity)을 부여하는 진정한 나"이다. 이런 식의 자아 설명은 대개 오해를 사기 쉽다. 사람들은 종종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찾는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대체로 자신의 특징 중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 알아낸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발견은 아마도 개인의 성장에 중요할 것이나, 이는 불교적 자아 의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중략) 한 사람이 계속 존재하려면 반드시 계속 존재해야 하는 그 사람의 어떤 한 부분이라는 게 없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주장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어떤 특성이 다른 사람보다 삶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사실일 수 있다. (중략, P91) 자아가 질적으로 유일무이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닌 문제는 다시 한 번 자아 개념과 자신의 모습, 속성, 특징에 대한 개념을 혼동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우리 각자가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을 살았다고 상상해 보자. 우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한때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과 꼭 같은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나인 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나의 자아라면, 나의 자아는 나를 다른 사람과 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비불교 인도 철학자들의 관점에서 자아는 단일하거나 부분이 없는 것이다. 자아는 단지 경험의 주체일 뿐이며, 우리가 하는 다양한 경험을 인식하는 우리의 일부이다. 통상 서로 다른 사람들을 질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아는 단일하기 때문에, 경험을 인식하는 동안 경험에 의해 변할 수 없다. 그 경험에 의해 변하는 것은 그 인격체의 다른 부분이다. 먹는 경험은 내 몸의 모양을 바꾼다. 커피 냄새를 맡는 경험은 내 마음의 욕망을 강화시킨다. 그들의 관점에서, 나의 자아는 이러한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단순히 목격하거나 알아차릴 뿐이다. (중략, P93) 두 자아가 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 둘을 구별할 수 없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진정 단 하나의 자아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이 둘을 결코 구별할 수 없을지라도, 이 둘이 수적으로 구별되는 두 가지 사물이라는 점은 완전히 사실일 수 있다.
P103. 만약 재생을 믿지 않는다면, 그 인격체가 단 한번의 생애 동안만 존재한다고 믿을 것이다. 온이 이와 관련된 의미에서 무상함을 보여주려면, 온이 한 인격체의 일생 전체에 걸쳐 존재하는 게 아님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이는 업과 재생을 가정하지 않고는 논증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뜻일까? 어쨌든, 우리의 신체가 삶 전체에 걸쳐 지속된다는 것은 사실이지 않나? 꼭 그렇지는 않다. 첫째, 자아는 인격체의 본질적인 부분이어야 하고, 신체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신체를 구성하는 기관 중 어느 부분이 본질적일까? 뇌는 어떤가? 나는 뇌 없이 살 수 없다. 즉, 뇌를 대체하는 수술 같은 건 없으니 나는 '이 뇌'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지마 여기서 문제는 "원칙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전적으로 현실상의 어려움인 것으로 보인다. 만약 뇌 전체를 재프로그래밍하는 방법을 안다면, 한 인격체의 심리를 모두 보존한 채 질병에 걸린 뇌를 건강한 뇌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뇌 대체 시나리오는 너무 공상과학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가 신체가 영구적임을 이와 관련된 방식으로 부정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이는 바로 -세포를 구성하는 분자 수준에서- 신체의 모든 부분이 끊임없이 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진대사와 감수분열같은 생명 과정에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교체가 따른다. 지금 내 뇌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는 이전에 내 뇌를 구성했던 원자와 수적으로 구별된다.
P107. 붓다의 요점은, 마음이 적어도 한 생애동안 존속한다는 결론은 환상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각각 단 한 순간만 지속되지만, 각각 서로 뒤따르는 개별 사건들이 끊임없이 연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사건들을 소유하는 마음 같은 것은 없으며, 단지 사건 자체들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건들이 끊임없는 상속을 통해 서로를 계승하기 때문에, 이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존속하는 어떤 존재에 대한 환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데카르트에 대해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흄은 경험의 존속하는 주체로서 자아라는 허구를 발명하게 만드는 건 바로 그러한 정신적 사건들 간의 관계라고 결론지었다. 흄과 마찬가지로, 붓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과관계緣起를 사용한다. (중략, P108) 감각은 본성상 부단히 새로운 대상과 항상 접촉하고 있다. 이는 느낌과 여타 정신적 사건들의 끊임없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흐름을 존속하는 단일한 존재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붓다는 이 흐름을 구성하는 개별 사건들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사건들이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방식을 보게 되어, 지속하는 경험의 주체라는 환상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의존적 발생에 호소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두 가지다. 즉, 의식의 흐름을 구성하는 정신적 사건 그 위에 있는 마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과 이 각각의 사건 자체는 아주 단기적이라는 점이다.
P109. 그러나 의지의 문제는 어떤가? 붓다는 우리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존속하는 의지가 아니라, 의지의 반복되는 패턴이라고 답할 것이다. 즉, 각각의 의지는 잠깐 동안 지속된 후 사라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욕구는 특정한 감각-대상의 접촉 사건에 의존해서 발생하고, 그 사건이 중단될 때 사라질 것이다. 대론자는 이러한 패턴이 하나의 존속하는 의지, 즉 항상 내개 현재해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영구적인 욕구가 존재한다고 가정함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대론자의 이론을 "벽장 속" 이론이라고 부르겠다. 이 이론은, 어떤 욕구들은 관찰되지 않을 때는 마음의 어두운 구석에 감춰진 채 계속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불교적 이론은 인격체의 신체 부위가 배열되는 방식에 호소함으로써 의지의 패턴을 설명한다. 불교도들은 위험자극이 위험을 피하려는 의지를 유발하는 건 뇌의 특정 뉴런들이 배열된 방식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이 같은 경우를 다루는 원리가 있다. 서양에서는 오컴의 면도날로 알려져 있지만, 인도 철학자들을 이를 가벼움의 원리라고 부른다. (중략, P112) 가벼움의 원리가 말하는 바는, 우리가 그래야 할 때만, 즉 관찰하는 대상을 설명할 그보다 더 나은 방식이 없을 때만,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벽장 속 이론은 의존적 발생 이론은 하지 않는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한다.
P114. 가벼움의 원리는 마음이 발명된 허구라는 주장을 불교도가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의미론적 실재론은 진술의 진실성이 우리의 이익이나 인지 능력의 한계 같은 주관적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객관적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 기본 발상은 무엇이 사실인지 알아내는 데 있어서, 마음 밖에 있는 세상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론적 실재론자들이 볼 때, 내 마음 속의 요인들을 통해 무엇이 사실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마술적 사고에 빠져드는 일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들은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수상하다고 말할 것이다. 이는 인지적 한계로 하여금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진술이 참인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인 것이다. 가벼움의 원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할 때만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를 상정하는 데 의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 마음을 굳이 '발명'하여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
P114. 그렇지만 초기불교가 이원론적임은 기억해 두자. 불교도들은 마음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러나 느낌과 지각 같은 정신적 사건의 존재는 색(rupa)와 구별되는 것으로 보며 긍정한다. 초기불교는 실체 이원론은 부정하지만, 소위 사건 이원론은 긍정한다.
P115. 많은 이들은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신체와 다양한 정신적 상태를 가지는 "내"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소유 감각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두기 때문이다. (중략, P116) "나"란, 그 인격체의 상태를 평가해서, 불만족스럽다고 여기는 점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떤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행 기능이라고 부르자. 그렇다면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자아는 실행 기능을 수행하는 인격체의 해당 부분일 것이다. 앞서 붓다는 각각의 온이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자아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자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고, 그렇기에 자아는 우리 눈에 항상 완벽할 것이라고 붓다가 가정하고 있다는 양 들린다. 왜 그럴까? (중략, P117) 이는 이 논증을 다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비재귀성 원리는 인도 철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원리에 대한 반례가 있는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는 어떤가? 의사 예의 문제점은 의사가 자신의 내성발톱을 제거할 때, 치료를 하는 주체는 내성발톱이 아니라 의사의 손이라는 다른 부분이라는 데 있다. 이 원리가 옳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 자아가 실행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면, 자아는 그 인격체의 다른 부분에 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지만, 자아 그 자신에게는 이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내가 불만족스럽게 여겨 나의 자아를 바꾸고자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뒤집어보면, 이는 내가 싫다고 여겨 바꾸고자 애쓸 수 있는 인격체의 그 어떤 부분도 나의 자아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중략, P119) 이쯤에서 뭔가 아주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한편으로는 실행 기능을 수행하는 인격체의 일부분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논증이 있다. 하지만 바로 이 논증에는 "나는 때때로 ~이 싫어서 바꾸고자 한다"라는 전제가 있는 것이다. (중략, P120) 그렇다면 인격체에게는 단지 관찰 가능한 부분들, 즉 오온 이상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리고 이 "이상의 것"은 실행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인 자아임에 틀림없다. 이는 또한 흄과 붓다가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때" 자아를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도 될 것이다. 자아는 관찰자이며, 재귀성 원리에 의해 자아 자신을 관찰할 수 없다. 오직 인격체의 다른 부분만인 오온만을 관찰할 수 있다. 붓다의 논증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데 실패한 것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도 밝혀지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불교의 무아 논증이 직면한 가장 심각한 반론이다.
P121. 대론자는 붓다의 논증의 결론이 실행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이 논증의 결론이 말하는 바가 아니다. 통제자 논증은 실행 기능을 수행하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말은 그 기능을 수행하는 다른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긴다. 더 정확히는 그 기능을 수행하는 여러 가지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불교도가 염두에 두는 바는 어떤 경우에는 인격체의 한 부분이 실행 기능을 수행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또 다른 부분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략, P122) 살아있는 모든 시민이 영국 군주의 신하인 것은 참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영국 시민인 것도 참이다. 그녀는 비재귀성 원리에 의해 그녀 자신의 신하가 아니다. (중략) 이를 "가변적 연합(shifting coalitions)" 전략이라 부를 것이다. 사실상 불교도는 대론자가 "나"의 두 번째 가능한 의미를 잊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략, P123) 통제자 논증에서의 "나"는 자아가 아니라,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P123. 그렇지만 불교도는 아직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다. 예를 들자면, 우리는 이미 붓다가 인격체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라고 말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더군다나, 만약 "나"가 인격체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인격체는 다수가 아니라 하나여야 할 것이다. 어째서 별개의 것들이 하나의 것을 지칭하는 단일한 이름으로 불리는가? 불교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바로 "나"는 불교도가 "편리한 지시어(가명)"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는 유용한 허구에 불과한 어떤 것을 일컫는 말이다. 인격체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전체다. 그리고 전체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게 아니라, 오직 부분만이 실재한다. (중략, P126) 자신의 이름은 실제로는 어떤 인격체가 아닌 무언가를 명명하는 유용한 방법일 뿐이다. (중략, P133) 이는 "부분전체론적 허무주의(mereological nihilism)로 알려진 견해이며, 바로 초기불교의 견해다. (중략, P135) 그런데 왜 전체가 실재하는 게 아님을 보여줘야 하는가? 답은 존재론적 태도가 우리의 이익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욕구나 필요에 따라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좌우되도록 내버려 둘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다. (중략, P136) 하지만 "전차"라는 말은 "단지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하자. "전차"라는 말은 이 말이 지시하는 듯 보이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한다. (중략, P137) 나가세나는 "전차"라는 단어를, 대응하는 말, 즉 "1다스" 같은 계수적 용어라고도 부른다. 계수적 용어란 별개 사물의 한 집합을 지칭하는데 쓰는 단일 표현이다. 이와 같은 용어를 사용할 때, 여러 별개의 별개의 사물들이 있을 뿐이지, 이것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부가적 사물은 없다는 걸 보통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이 표현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된 사물들의 모음을 지칭하는 편리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P138. 나가세나가 말하고 있는 바는 인격체가 존재한다는 건 궁극적으로 참이 아니지만, 세속으로는 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다음처럼 규정될 수 있다. [어떤 진술이 편리한 지시어를 사용하고 확실히 실행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면, 이럴 때에만 이 진술은 세속적으로 참이다.] [어떤 진술이 사실과 부합하고 개념적 허구의 존재를 주장하거나 전제하지 않는다면, 이럴 때에만 이 진술은 궁극적으로 참이다.] (중략, P139) "세속적"이라고 번역되는 해당 산스크리트어(samvrti)는 문자 그대로는 "은폐"를 의미한다. 그리고 불교 주석가들은 편리한 지시어가 실재의 본성을 은폐한다고 말하는 식으로 이 용어를 사용한다. (중략, P140) 그렇지만 모든 세속적으로 참인 진술 이면에는 세속적으로 참인 진술을 수용하는 일이 실행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훨씬 긴) 궁극적으로 참인 진술이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P141. 붓다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격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는 단지 무상하고, 비인격적인 상태의 인과적 연속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다른 겨우에 그는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신 업과 재생의 교리에 기초한 도덕성을 가르친다. 이 두 경우의 불일치는, 이번 생의 행위로 다음 생의 업의 결과를 받으려면, 하나의 동일한 인격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후자의 가르침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초래된다. 주석가들은 이러한 중대한 오류를 이 전통의 창시자 탓으로 돌리는 걸 피할 방법을 발견했다. 첫 번째 종류의 진리는 완전하고 최종적인 진리를 나타내는 반면, 두 번째 진리는 일반인들이 이 완전하고 최종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로 진입하기 위해 우선 알아야 할 것을 나타낸다. (중략, P142) 이는 붓다의 교육학적 기술, 즉 대중의 역량에 맞게 가르치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재생이라는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부도덕한 행위를 하고, 이로써 재생의 굴레에 더 단단히 속박될 뿐인 것이다. 업에 기초한 도덕성을 가르침으로써 무지를 강화하는 행동을 덜 하도록 바라는 것이다.
P145. 세속적으로 인격체라 불리는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진리는 바로 무상한 온들의 인과적 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몇 가지 의문점이 있다. (중략, P146) [수적으로 구별되는 온들은 인격체를 수적으로 구별되게 만든다.] 나가세나가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이 원리(단멸론)를 받아들인다면, 불합리한 결과가 뒤따른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이 원리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략, P147) 이 원리에 따르면 학위를 취득한 인격체는 해당 학위 시험에 응시한 인격체와 동일하지 않고, 죄수는 그 범죄를 저지른 인격체가 아니라 처벌받을 이유가 없다. 밀린다는 이것이 모두 불합리한 결과라는 데 금세 동의한다. 그러나 잠시 멈춰서 왜 그런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 세속적 진리는 세속적으로 유효하고, 이는 궁극적 진리에 의존
P149. 궁극적 진리의 수준에서는 인격체에 대한 어떤 진술도 참일 수 없다. 성인과 유아가 동일한 인격체인지, 아니면 별개의 인격체인지 묻는 건 인격체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걸 당연시하는 일이다.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질문은 궁극적 수준에서는 제기될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세속적 수준에서는 나는 그 유아였다고, 즉 우리는 동일한 인격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왜 유효한가? 궁극적 진리는 유아 온들이 소멸하면서 아동 온들이 생기하는 원인이 되며, 이런 식으로 단절 없는 연쇄를 이루면서 현재의 성인 온들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중략, P150) 현재 온들이 연속 상의 과거나 미래 온들과 동일시할 때 -그러한 다른 온들을 "나"로 생각할 때- 현재 온들은 이후 온들을 위해 더 나은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더 크다. 자신을 인격체로 생각하는 건 연속상의 과거나 미래 온들과 동일시하는 습관을 가지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로, 자신을 인격체로 생각하는 게 유용하다. (중략, P151) 세속적 진리는 나라는 것이 일정 기간 존재해 온 인격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존재에 "내"가 하는 잡다한 경험들을 알아차리고 있는 하나의 "나"의 있음이 수반되어 있다는 식으로 경험들을 한다. (중략, P152) 하지만 궁극적 진리는 정신물리적 요소들의 인과적 연속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각 요소는 잠깐 동안 존재하고는 소멸하지만, 대체 요소가 생기하는 원인이 된다. (중략) 이 연속하는 것을 두고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라고 생각하는 일이 유용하게 되는 건 바로 이 같은 실재 덕분이다.
P154.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재생이 가능할까? (중략) 재생은 이전移轉이 아니다. (중략, P156) 타는 양초는 타는 기름 램프가 존재하는 원인의 역할을 하고, 선생님의 시에 대한 지식은 학생이 시를 아는 원인의 역할을 한다. 이 같은 발상으로 보면, 하나의 온들의 집합, 즉 이번 생에서 인격체를 구성하는 온들의 집합이, 새로운 온들의 집합이 새로운 생의 환경에서 존재하는 원인이 될 때 재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한 일생 동안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재생의 과정은 인과법칙, 즉 업의 법칙에 의해 지배된다. 내가 이런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내가 이런 욕구를 가지고 이런 일을 했기 때문이다. (중략, P157) 여기에는 또 다른 우려가 있다. 업은 일종의 자연적 정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이 선행 행위로는 좋은 재생을, 악한 행위로는 나쁜 재생을 받는다는 것이다. 행위를 하고, 그런 뒤 보상이나 처벌을 받는 자가 하나의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이게 어떻게 정당할 수 있겠는가? (중략, P158) 남자가 몸을 데우려고 지핀 모닥불은 다른 남자의 밭을 태운 불이 아니다. 수적으로 동일하지 않지만, 하나의 불이 다른 불을 일으켰기 때문에 첫 번째 남자가 두 번째 남자의 밭을 불태웠다는 점은 세속적으로 참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악한 행위의 실행에 수반되는 정신물리적 요소들은 아귀라는 고통스러운 여건으로 태어난 정신물리적 요소들과는 궁극적으로 구별된다. 이 인간 온들이 저 아귀 온들을 초래했기 때문에, 그 아귀가 나, 즉 그 행위를 한 자일 것이라는 점은 세속적으로 참이다. (중략, P159) 이는 불교도가 업과 재생의 교리는 무아와 양립할 수 없다는 비난에 맞서 이 교리를 방어하는 방법이다. 물론 업과 재생이 합리적인 불교도라면 버려야 할, 받아들이기 어려운 믿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요점은 세속적/궁극적 진리 이론과 인격체가 세속적으로 실재한다는 주장이 재생과 무아가 양립할 수 없는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는 데 있다. 불교도들이 재생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일이 있다면, 이 믿음이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중심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P173. 아라한은 온전히 현재 순간만을 사는 누군가일까? 이는 불교적 열반에 대한 대중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잘못된 해석이기도 하다. (중략, P174) 단멸론자들은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특정 온들의 집합이 지속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중략, P175) 이 명제는 세속적으로는 참일 수 있을까? 진술이 세속적으로 참이려면, 확실히 실행의 성공으로 이어져야 함을 떠올려 보자. 확실히 모든 사람은 실행의 성공이 더 많은 즐거움과 기쁨을 가져오는 실행이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인격체로 생각할 때, 전반적인 즐거움과 기쁨이 더 크고 전반적인 고통과 괴로움은 더 적다. 이 현재의 온들을 인과적 연속 상의 미래의 온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양치와 치실질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충치와 잇몸 질환이 더 적어지리라는 걸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단멸론자의 조언을 따른다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고통과 괴로움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 명제는 세속적으로 거짓이다. 현재의 온들이 이 연속 상에서 미래의 온들의 원인이라는 게 궁극적으로 참이기 때문에, 우리가 인격체라는 건 세속적으로 참이다. 그래서 이 온들이 행하는 일은 그 미래의 온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래서 단멸론은 불교적 열반을 이해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중략, P177) 이 논증에 대한 단멸론자의 반론은, 어떤 이론이 세속적인지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결정하는 데 미래의 즐거움과 고통을 계산에 넣는 게 옳다고 이미 가정하고는 논증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도는 이 반론도 역시, 현재의 즐거움과 고통만을 계산에 넣는 게 옳다고 이미 가정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P178. 우리는 자신이 일시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내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 들 때 실존적 괴로움을 경험한다. 그런데 어떻게 내 삶이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는 자신을 한 인격체로 생각할 때 갖는 의미의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인격체는 "평균적인 대학생"같은 말처럼 단지 유용한 허구일 뿐이다. 우리는 통계적 허구의 삶이 갖는 의미를 찾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P180) 나는 인과적 연속의 과거 및 미래의 단계와 계속 동일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내 인생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나는 이것이 세상에 더 많은 즐거움과 더 적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방법이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 나는 이 연속의 미래 요소들에 특별한 관심을 쏟기에 양치질과 치실질을 한다. 그래서 고통이 적다. 나는 연속의 과거 요소들에 책임이 있기에,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이 적다. (중략, P181) 깨달은 인격체는 삶의 사건들에 의미와 가치를 덧씌우는 자아라는 목발에 기대지 않은 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깨달은 인격체도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충치의 고통을 피한다. 그러나 깨달은 인격체는 실존적 괴로움도 피한다. (중략) 궁극적 의미의 결여가 우울감의 근거가 되려면, 무의미를 절망의 원천으로 삼는 어떤 주체가 존재해야 한다. 불교도가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건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불교도들은 의미에는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즉 삶의 사건들에 의미를 수여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러한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 그 삶의 모든 의미를 결여할 주체도 똑같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삶의 의미를 가지거나 결여하지 않는다. 그저 삶이 존재할 뿐이다. (중략, P182) 오늘 밤 맥주를 얼마나 마실지 결정할 때 내일의 숙취를 고려하는 일과, 이러한 결정을 나라는 존재가 내린다고 보는 일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내 삶의 매 사건이 내 동일성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일 수 있다. (중략) 깨달은 인격체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되는 부담에서 자유롭다.
P184. 우리는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도덕적 동기, 즉 왜 나는 도덕적이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중략, P185) 불교도의 답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각각의 층위는 열반으로 가는 길의 특정 단계에 있는 사람들의 능력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도덕적 동기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첫 번째 답은 도덕적 규칙이 업의 인과법칙을 반영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답은 분명 업과 재생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이들만 만족시킬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점은, 삶의 주된 목적이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 데 있는 이들에게만 이 답이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적극적으로 열반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 즐거움과 기쁨이 삶의 목적인 사람들이 열반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중략, P186) 두 번째 층위의 답은, 그렇게 하는 게 열반을 얻는 데 필요한 훈련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삼독을 중화하기 위해 해독제 역할을 하는 습관(정어, 정업, 정명)을 개발해야 한다. (중략, P187) 삼독은 세속적으로 유덕한 사람들의 삶에도 못지않게 퍼져 있다. 이러한 도덕적 실천의 요점은 재가인의 존재를 포기하고, 비구나 비구니가 되는 게 충분히 가능하도록 삼독을 중화하는 데 있다. 부도덕한 행위를 하면 안 되는 이유는 열반이 도덕적으로 순수한 자에 대한 보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가 무아에 대한 해탈 통찰을 장애하는 동기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P188. 그러나 열반을 얻은 사람들은 어떤가? 이들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가? 이제 세 번째 층위에 도달했다. 여기서 살펴볼 점은 자선을 베풀어야 할 의무에 대한 논증이다. (중략, P189) 이 논증이 주장할 바는 일단 무아의 진리를 파악하면, 타인의 행복보다 자신의 행복을 더 선호할 이유가 없음을 알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가 이미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함을 인정하기 때문에, 당연히 깨달은 자는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킬 의무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증이 주장하는 의무는 깨달은 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참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중략, P191) [1. 우리는 각자 오직 자신의 괴로움만을 막을 의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2. 자신의 현재/미래 괴로움의 경우에 괴로움을 겪을 한 온들의 집합의 이익을 위해, 막는 행위를 하는 것은 다른 온들의 집합이다.] [3. 미래 온들과 별개의 현재 온들을 "나"로 부르게 하는 "나"라는 느낌은 개념적 허구다.] [4. 그러므로 어떤 괴로움은 자신의 것이고, 어떤 괴로움은 타인의 것이라는 건 궁극적으로 참일 수 없다.] [5.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괴로움만 막을 의무가 있다는 주장에는 궁극적 근거가 없다.] [6. 그러므로 괴로움이 언제 어디서 발생하든 상관없이 괴로움을 막을 의무가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괴로움도 막을 의무가 없다.] [7. 그러나 적어도 어떤 괴로움은 (즉, 자신의 괴로움은) 막아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한다.] [결론: 언제 어디서 발생하든 상관없이 괴로움을 막을 의무가 있다.]
P194. 많은 사람들은 불교도들이 "나에게 자아가 없다면, 당신과 나는 실제로는 별개의 사람이 아니며 우리는 진정 하나이니, 따라서 나는 나의 행복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당신의 행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불교도가 말하는 바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는 진정 하나이다"라는 데서 비롯된다. (중략, P195) 불교도는 인격체가 존재하는 걸 부정하는 것이고, 다수거나 아니면 진정 하나일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만약 불교의 논증이 효과가 있다면, 도덕성을 위한 합리적이고 비유신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등장하지 않은 또 다른 요점이 있다. 즉, 복수의 개별 인과적 연속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효과가 나타나는 장소에 따라 구별될 수 있다. 이 연속에서 꾸준히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인과적 연속에서 충치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오직 이 연속에서만 충치가 일어난다. 바로 이 사실을 통해 편의상 한 연속을 "나"로 그리고 다른 연속을 "너"로 지정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사실이 바로 각기 충치가 일어나는 별개의 인격체라는 점을 세속적으로 참으로 만드는 궁극적 진리가 아닐까? 이 경우, 자신의 괴로움만을 막을 의무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궁극적인 근거가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P198. 나의 모든 행위가 인과적으로 결정된다면, 내가 어떻게 그 행위들에 책임이 있을 수 있을까? 이는 자유의지 논쟁에 등장하는 질문 중 일부이다. 그러나 인도철학에는 이와 같은 논쟁이 없다. (중략, P201) 오직 인격체만이 어떤 일을 하는 데 책임이 있는 속성을, 즉 그 행위에 대해 칭찬이나 비난을 받을 속성을 가질 수 있다. 인격체는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기 때문에, 인격체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다. 그래서 온들의 집합처럼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들이 어떤 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이것들에 책임이 없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지 않다. (인격적 동일성에 대한 판단이 세속적으로만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임 판단도 세속적 진리의 수준에서만 이치에 맞을 수 있다. (중략) 궁극적 사건들이 모두 인과적 연속의 일부라는 사실은 책임 판단에 관한 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궁극적 사실은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세속적으로 참이거나 세속적으로 거짓으로 만들 수 있다. (중략, P202) 궁극적인 수준에서 유지되는 인과적 결정론은 세속적으로 참인 사실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