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책

<유쾌한 불교> - 오사와 마사치, 하시즈메 다이사부로

날들 2025. 3. 8. 20:47


1. 충동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책 앞날개에 있는 옮긴이 설명란이다. 남산강학원이라는 공부모임에서 인연이 닿은 듯한 세 명의 공동 번역자. 그 중 두 명이 스스로를 백수로 정의하고 있었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백수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그들을 선망하는 감정이 생겼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밥벌이와 무관하게' 알고 싶은게 참 많은 사람이다. 이들과 달리 나는 그런 스스로를 긍정하지 못했다. 앞으로 나도 학인이나 백수가 꿈이라고 말해볼까 싶다.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동지들이 생기면 재미있겠다.

“아무리 가져도, 진짜 친구 한 명이 없어 불안한 거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서 필동로를 따라 남산 쪽으로 10여분을 걷다 보면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이 나온다. 바닥에서부터 ‘고전’ 공부 바람을 몰고 온 ‘수유+너머’의 전통을 잇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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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타마 붓다는 말로써 설명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는 지혜를 보여주었다. 고타마 붓다조차도 침묵했다. 나에게는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나, 알고는 있으나 설명이 버거운 것을 어떻게든 답해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정교화하는 동시에 입으로 의식의 흐름을 내뱉는 것인데, 의욕은 가상하다지만 자칫 게걸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잘못된 설명을 뻔뻔하게 읊지는 않을까 하는 자각이 있다. 하지만 상대와 이어져 있다는 고양감과, 알고 있는 것(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을 다 토해내기 전엔 무지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승부욕으로 인해 늘 입이 먼저 움직이곤 한다. 최근 얼마 동안 나는 다르마의 편린을 본 것만 같아 조금 들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여전히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상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열심히 깨달음을 추구하더라도 결국 이번 생에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게 불교적 관점으로는 당연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능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순간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희망적인 기분이 든다.


P28. 말은 깨달은 사람, 깨닫지 못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 직전에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도 일반적으로 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보통의 말의 용법 안에 깨달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도 말로써 그것을 전달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불교의 '깨달음'이 메시지가 아니고, 따라서 도그마도 될 수 없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중략) 불교 신앙의 핵심은 "부처(고타마 그 사람)는, 깨달은 게 틀림없다"라고 확신하는 것, 그 확신이 전부입니다. 이로부터 불교의 모든 성질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58. 승가의 특징은, 여러가지 규칙이 있지만 한마디로 비즈니스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상업을 할 수 없죠. 땅을 파서는 안 되고, 물을 뿌려도 안 됩니다. 즉 생산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비생산계급이 되는 거죠. 그러면 생산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산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인데, 이 비즈니스는 카스트제에 의해 엄밀히 사람들 사이에 분배되고 있습니다. 결국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를 어떤 의미에서는 통째로 긍정하지 않으면 불교는 존속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거죠.

P61. 인도에서는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 카스트가 있죠. 카스트는 비즈니스의 독점과 분배를 통해 상호의존 네트워크를 만들기 때문에 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P72. 불교에서는 인과론이 바탕이 되고, 자유의지가 거기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자유의지가 효과가 있냐 하면 궁극적으로는 '발심'의 순간입니다. 발심이라는 것은 '나는 이 세상에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그 기회를 활용해 붓다가 되는 길을 가겠다'라고 결의하는 것입니다. '발의'라고도 하죠. 이렇게 결의할지의 여부는 인과관계로 정해져 있는 것도, 누구에게 강요당하는 것도 아닙니다.

P88. '고'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여기지 않으면 됩니다. 어쨌든 괴로움을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옳습니다. (중략, P91) 불교의 극복 방법은 안/밖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가 생긴다는 구조이므로, 우주와 동물을 한꺼번에 인식하라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P102. 베버가 논한 것은 원래 아무것도 하고자 하지 않았던 기독교가 왜 어느 시점에 적극적인 에토스(행동양식)로 가득 차 세속적 금욕주의(신의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절약)로 변모한 것인지 그 조건을 밝혀냈다는 겁니다. 그 조건의 구조를 살펴보면, ①인간에게는 가치가 없다. ②인간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God이 인정한 경우이다. ③인간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신의 계획 중 일부를 대신 실행하는 경우에 한한다. ④신은 모든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⑤실행행위는 정치, 경제, 사회적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P103. 불교의 가장 중요한 점은 A가 깨닫는 것과 B가 깨닫는 것이 양립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방해하는 관계가 아닌 거죠. 그래서 사람과 사람이 다툴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사람과 사람이 다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생각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P108. 비즈니스가 금지되어 탁발을 하는 것은 어떤 느낌이냐면 밥 구경도 못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말입니다. 굶주릴 각오를 하는 것이 출가입니다. 1주일이나 2주일을 넘기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서 훔치는 것은 금지입니다. 출가를 그만두고 환속하는 수밖에 없죠. 죽음과 등을 맞대고, 내일조차도 알 수 없는 장소에 몸을 두고 긴장감을 높여, 생존을 걸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승가 본래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식사를 재가자에게 받으니 변변치 못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출가시스템이 재가사회에 속수무책으로 보이는 건, 그러니까 한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의 아카데미즘과 꽤 비슷한 것을 미숙하게나마 실현하는, 당시의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P112. 부동산이나 정기적인 기부가 있으면 사느냐 죽느냐의 고비에서 개인주의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승가에 기생해서 지내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승가가 속세간화됩니다. 출가했으나 비영리법인 같은 속세의 사회 조직에 가까워진 거죠. 그렇다면 이제 승가가 아닌 곳에 다시금 개척지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승이 된 게 아니었을까요?

P115. 인도 사회에서 '진리'는 지극히 귀중한 것으로 그 사회 속에서 얻을 수 있는 부나 권력이나 영예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브라만 계급의 존재 이유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 브라만의 '깨달음'이 그 외의 카스트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비춰졌을 경우,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무상'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리의 바깥에는 현상세계가 있고 그것에는 실체도 가치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 사회에는 실체도 가치도 없다고 주장할 때 카스트제도가 무의미해지죠. 누구나 그러한 인식을 가질 수 있다면 브라만의 우위도 부정되고요.

P127. 적극적 자유가 있는 상태란, 내가 정말로 욕망해야 할 것을 욕망하고 그 욕망에 합치하는 행동을 선택할 때입니다. 그러나 욕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어렵죠. 따라서 적극적 자유의 개념에 의거하면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윽고 '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본래의 올바른 욕망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권위 있는 인물이나 집단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벌린이 염두에 있는 것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입니다.

P138. 가령 모든 실체는 실체를 갖지 않는다라고 누군가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합시다. 그가 철저하게 자신의 실체성을 부정하면서 그런 말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의 말을 100%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실체성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 실체성은 명명할 수 없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효과(effect)입니다. 실체(substance)가 아닙니다. 신기루 같은 것으로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죠. 붓다라는 존재도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가 그런 신기루 같은 존재를 만들어 버리는 구조를, 사람들이 '붓다가 있는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P144. 깨달은 경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타자도 없습니다. 자신과 타자의 구별이 없죠. 그래서 누구를 만나든 과거의 자신으로 만나는 것이 됩니다. 나는 깨달았기 때문에 우위에 있고, 상대는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안쓰럽게 열위에 있지만, 모두 자신임에는 틀림이 없기에 자신에게 대하듯 손을 내밉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점에서는 슬픔悲인 셈입니다. 하지만 자신이기 때문에 자애로울慈 수 있어 '자비'라고 부르는 것이겠죠. 이것은 사랑愛과는 다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를 긍정하는 것인데 왜 긍정하냐 하면, 기독교의 경우 가치가 없음에도 긍정합니다. 가치가 있는 것은 God뿐이니까요. 이웃은 가치가 없어요. 하지만 God이 사랑하라고 말했죠. 그래서 사랑합니다. '자비'의 경우에는 상대가 깨달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불성이 있습니다. 즉, 상대에게는 소소하지만 가치가 있습니다.

P145. 사랑은 본래 자기와 가까운 타자에게만 집착하고 남을 배제하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불교가 사랑을 욕망, 번뇌로 연결시켜 이를 멀리할 때는 사랑의 배타적인 측면, 차별화하는 측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사랑은 정의나 공평성에 어긋납니다. 사랑은 인간의 너그러운 공동성이라든가, 인간의 복수성, 다양성이라는 것을 성립시킬 수 없습니다. 정의는 제3자라고 할까 신의 관점에서 본 공평성에 관련되어 있으므로,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과는 대립합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는 법을 중시합니다. 법은 그러니까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안티테제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스도의 이웃사랑이라는 것은 그 법에 대한 또 다른 안티테제입니다. 본래의 소박한 사랑에 대한 부정의 부정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한 사랑은 원래의 사랑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 됩니다. 즉 그리스도가 설하는 이웃사랑은 가까운 사람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원수처럼 멀리 있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 됩니다. 혹은 가치 있는 타자에 대한 사랑이 아닌, 죄인 같이 가장 가치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되는 거죠.

P165. 다르마는 인격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르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식으로 나타낼 수 있지만, 지식으로 나타내기 전부터 객관적인 것으로 있습니다(있다고 하면 존재 같고 어폐가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수행이 불가능합니다). /// 잠정적으로 다르마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있다는 것의 보증으로서 붓다가 있는 느낌입니다. 붓다 없이 다르마가 있을까 없을까에 대해서 우리는 확증할 수 없는 거죠.

P168. 왜 다르마가 이토록 의심받지 않냐면요. 인도 사회에는 브라만교, 힌두교가 주류잖아요? 그 인도 사회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만들이 다르마가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르마가 없다고 하는 것은 반정부운동, 반체제운동,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인 겁니다.

P184. 자기가 없는 사람이 이타행을 할 수는 없어요. 석가모니는 자기는커녕 타자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가 있는 것으로 한 이상(인간으로서 설법하는 일을 선택한 이상), 그 게임 속에서는 타자도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타자가 보기에는 자신이 실재하고 있다는 식의 미망의 상태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이 아니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자비입니다.

P204. 불교의 경우 종종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면 자기가 부처가 아닌 상태에서 부처가 되는 것이므로 주체와 객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행위지만 자신의 행위조차도 아니고 자연현상입니다. 어느 일정한 포인트를 벌어들이고, 어느 일정한 공덕을 쌓으면, 부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프로세스라고조차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과정이며, 필연적이라서 자기 이외의 제3자가 거기에 개입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다른 부처가 당신을 부처로 만들어 준다는 구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구원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라는 문제가 있겠네요. 그렇다면 아미타불이 사람들을 구원하는 걸까요, 아닌 걸까요? 아미타의 본원을 보면, "OO의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은 극락으로 왕생케 한다(왕생시키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극락에 왕생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뭐랄까, 윤회의 일종입니다. 극락에 왕생하지 않을 경우, 인도라는 사바세계에서 윤회를 반복할 뿐이니까 극락에는 올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평범한 인도 사람이죠. 극락에 왕생하는 경우 인도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극락에 태어납니다. 윤회법칙의 예외 혹은 행선지를 교체하는 것입니다. 극락에 왕생하고 나면 어떻게 될까요? 아미타불의 설법을 듣습니다. 극락은 기분 좋은 곳이기에 정신집중이 잘 되어 이해가 빠릅니다. 순식간에 수행의 수준이 올라가는 거죠. 수행을 하고 있으니 부처는 아니지만, 그 일보 직전, 그러니까 다음에 죽고 다시 태어날 경우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일생보처一生補處라는 무대에 도달하는 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이죠. 다시 태어나면 이번에는 부처가 됩니다. 그것은 아미타가 그렇게 만든 걸까요? 그런 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입니다. 아미타불이 그 옛날 서원한 대로 깨달음에 안성맞춤인 극락정토라는 불국토가 출현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미타불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면, 설교를 하고 있는 겁니다. 거기서 극락에 왕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예약을 하고 있는 거죠. 그것 뿐입니다. 누군가가 항공권을 사고 호텔 예약을 했다고 해도, 그 비행기를 타고 학위를 따러 와서 수행하는 것은 역시 본인입니다.

P212. 동일성이 가정되지 않아 곤란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냐 하면 말을 못 쓰게 됩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동일성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사고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감각과 의식의 어지러운 변화에 맞서 있을 뿐이니까 이걸 '나'라든가 '시계'라고 불러도 소용없는 것이죠. 말을 사용할 수 없다면 감각이나 의식을 정리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는 이 곤란함을 선명한 형태로 말하고, 보여 주고 있죠. 불교가 인과론을 설명함으로써 번뇌(사회상식에 사로잡혀 막히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과론은 그 자체로는 출구 없는 미로 같은 것일 뿐입니다. 거기서 불교는 출구를 어디로 생각하냐면, 예를 들어 '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동물을 먹기 때문에, 다른 동물의 생명을 빼앗고 있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자, 그럼 살생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그것이 생명의 조건이라 할지라도 다른 생명을 함부로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선악이고, 가치관입니다. 이쪽이 더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이쪽이 더 좋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과론을 끝까지 밀고 가면 생명 같은 것은 일시적인 기호가 되니까 사자는 사자라는 허깨비이고, 토끼는 토끼라는 허깨비이기 때문에 사자가 토끼를 먹은 것은 허깨비가 허깨비를 먹은 것이 되죠. 이래서는 살생계라는 게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의 방식이 있다. 살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규칙 중 하나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과의 소용돌이인 전체로서의 이 세계를 인식한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불교는 상식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니힐리즘이 아닙니다. 사회상식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인간은 일단 상식 속에 살고 있고, 일단 나한테는 고타마, 당신한테는 아난다라고 이름이 붙어 있어 동일성이 있습니다. 거기에 질서를 만들어 선악이 있고,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인간적인 방식, 올바른 삶의 방식이 있다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가르칩니다. 살생은 안 된다는 살생계는 인간만이 지킬 수 있는 규칙입니다. 사회의 근저에 있어서 인간이기 위한 조건을 지탱하는 규칙입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죠. 인과론에 입각하면 자신의 자기동일성이라든가 살생하면 안 된다는 규칙 같은 것은 성립될 리 없습니다. 살생을 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죠.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살생을 하지 않습니다. 살생계가 있으니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행위(올바른 인간이라는 것)를 그때그때 가려낼 수 있습니다. 칸트의 자유의 이율배반과 같은 논리에서 살생계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바르게 살아갈 가능성을 주는 것이죠. 그와 동시에 수행하는 가능성도 부여됩니다. 부파불교는 계의 이런 작용을 다시 인과론으로 설명하기 위해 계체戒體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계를 받으면 계체라는 것이 깃들어 그 사람이 악을 행하기 어렵게 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계체가 원인, 행위가 결과라는 인과론이죠.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순순히 인간은 인과론의 세계에서 올바른 인간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올바른 사람이란 물건을 훔치지 않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과음하지 않는, 난잡한 섹스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가치가 있습니다. 동시에 부처에 가까워지는 길, 혹은 부처이기 위한 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일성이나 사회상식을 일단 무화한 뒤 다시 복원하는 것이 불교의 중요한 핵심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교는 단순한 니힐리즘이 됩니다. 이율배반일지 모르지만 불교는 그것을 떠맡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선악은 성립되지 않으니까요.

>>> 깨달음을 위해서는 집착을 다스리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기 때문인 것 같다. 현재 사회적으로 형성된 기준에 무슨 가치가 있나 따지고 분석하고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보다는, (선악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구성물이자,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최선을 확인할 수 없어서 틀릴 수 있음에도) 내가 원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외부의 허깨비를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안과 밖의 구분을 허물어 내 집착을 무릎 꿇리는 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헛된 집착의 지배에 사로잡혀 있음을 인정하고, 자유로 포장된 욕망이나 두려움의 노예로 살기를 멈춰야 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깨달음이란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집착을 완전무결하게 통제하겠다는 집착까지도 비워야 할 것이다. '계'를 지킨다고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주류적인 규범에 내 욕망이 부합하는데, 반대로 내 욕망에 부합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한 어떤 비주류적인 양심이 있는 상황을 상상해 봤는데, 이때는 사회적인 멸시를 감수하고도 주류적인 규범을 택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선을 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절대적이라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추구에 부합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한 일이 보통 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리이타원만이니 자기를 위한 행위와 타인을 위한 행위가 언제나 분리되어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 언제나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해 본 가정이다.

P228. 석존의 전생담(석가모니 부처님의 재가자 시절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장래 붓다가 될 석존의, 윤회를 거듭하는 재가수행 시절을 보살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보살의 수행은 윤회하면서 행하는 것이므로 일종의 나선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얼마나 훌륭한지 설명하기 위한 논리인데, 나선은 빙글빙글 돌며 한없이 뻗어 나갈 수 있잖아요. 처음에는 출가에 나름대로 역점이 있었는데, 그것이 아니라 윤회하면서 수행을 이어 가는 재가시절이 보살이고, 이 시절이 가치 있는 중요한 이야기가 되면서 점점 이야기가 불어났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까마득할 만큼 오래 윤회하셨으니 (중략) 모든 인도 사람의 운명을 거쳐 그 속에서 깨달음의 원인을 축적해 나갔을 겁니다. 그러면 지금 빵집, 신발가게를 하는 인도 사람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보살이라고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고요. 이것이 대승교입니다.

P238. 불교의 경우에는 신이 없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은 수행의 편의를 위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본인의 창의성 발굴이거든요. 이때 출가하는 것은 깨닫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단지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편리해질 뿐입니다. (중략, P239) 그러면 재가와 승가의 관계는 세금으로 맺어질 수 없습니다. 탁발과 보시의 관계가 됩니다. 명령이 아닌 자발성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재가에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석가모니 부처님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율장에는 '한 집에 연이어 며칠씩 탁발하러 가면 안 된다. 장소를 옮겨라' 같은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탁발이 재가에게 폐(착취)이기 때문입니다. 식사를 주면 공덕이 된다는 논리로 넘어가지만 이 관계는 불안정합니다. 더구나 재가는 명예를 얻을 수 없죠. 재가의 불교도는 명예도 얻지 못하고 착취당해서 '뭐야, 이거' 하게 되니까 자주성을 되찾자는 운동이 일어나겠죠.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 승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겁니다. 출가는 부처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식으로요. 그리고 나에게도 부처가 될 권리를 확실히 인정하라고 하는 것이죠.

P248. 재가 사람들은 그 사회의 제도나 가치관에 속해 있지 않으면 비즈니스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식욕이나 법률 등 사회적 가치는 사실 실체가 없는 미혹이며 번뇌인 것이죠. 그런 미혹, 번뇌에 봉사하지 않으면 재가 활동(보살행)이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자비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안쓰럽기 때문에 여러가지 서비스를 하며 그런 사람들을 구해 주는 것 같은 메타 차원의 재가 활동이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비즈니스를 비즈니스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메타 차원의 자비로서 실천하겠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빵을 굽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빵을 먹고 싶은 번뇌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번뇌로부터 그 자신을 구할 수는 없지만, 번뇌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빵을 구워 모두에게 나눠 주고 있달까요. (사회 인프라의 정비, 공중위생, 약자 돌봄)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지만 당장의 번뇌를 최대한 줄이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P255. 다양한 직업 중에, 예를 들어 동물을 죽이는 전문가나 전쟁을 하는 사람처럼 공덕을 쌓기 어려운 직업을 가진 사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면, 비즈니스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전체가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 네트워크를 조정해 버리면 누군가는 포인트가 쌓이기 쉽고, 다른 사람은 포인트가 쌓이기 어렵게 됩니다. 즉 그 네트워크 안에는 언제라도 자비가 작용한다고 말할 수 있죠. (타인의 구제를 위한 원인을 내가 쌓는 게 가능하다) (중략, P257) 대보살은 그렇게 해서 마이너스 포인트를 떠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비에 근거해 척척 행동합니다.

>>> 비가시화된 사회구성원의 업은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지는 것이다.

P258. 계를 지킨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출가자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이나 출가의 상대화가 가능한 것도 승가의 '계'가 깨달음, 성불과 필연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죠. (중략, P259) 이슬람교의 오행육신과 비슷한 것으로 보살을 위한 육바라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시, 지계, 인욕(인내), 정진, 선정, 반야까지 여섯 가지죠. 각주적으로 정리해 두면, 육바라밀에는 자기 자신을 향한 것과 타자를 향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과 관련된 실천이 지계, 정진, 선정, 반야입니다. 타자와의 관계가 들어오는 것에는 우선 보시가 있고, 거기에 더해 인욕이 있습니다. 타자에게 적극적인 관계가 보시라면 부정적인 타자와의 관계가 인욕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육바라밀 역시 확실히 구제에 이르는 방법이 아니고 각각의 바라밀의 내용은 막연합니다. 결국 이렇게 하고 있으면 확실히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을 하면 절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같은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을 위해 대체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깨달은 상태라는 것이 있어, 거기서부터 더는 전진할 수가 없습니다. (중략, P261) 깨달은 자라면 '아, 이런 것은 아직 생각하지 않았었구나'와 같은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체지一切智라는 것은 아마 그러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 대략 생각하거나 느낀 모든 것을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P277. '공'이라는 사고방식이 무엇인가, 확실히 정말로 있는가 하는 것이 실로 의심스럽더라도 그것(진리)을 알고 있는 상태(지혜)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도 존재할 것이라고 확실하게 여겨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과 붓다는 표리관계에 있습니다.

P278. '공'의 입장에서 볼 때 언어의 문제점은 언어가 대상의 동일성, 실체성을 상정해 버린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혜와는 거리가 멀죠. 그래서 붓다의 지혜를 언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중략, P279) 그럼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떻게 했냐면 깨달은 후 말을 하지 않는 옵션(무기無記)을 제시했습니다. 즉, 침묵했습니다. 따라서 설법의 역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 하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략) /// 불교의 진리는 말에 부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말에 배반당할 때만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P298. 진리를 이중화하는 것도 불교의 특징입니다. 한쪽에는 궁극의 진리로서의 제일의제(승의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공'의 입장, 실체는 어디에도 없고 모든 것은 '공'이라는 진리죠. 하지만 그 입장으로 일관해 버리면 이 세계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로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진리, 세속제를 인정합니다. 세속제는 언어적인 분절을 받아들여 그에 대응한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진리의 이중성이 있으면, 어떤 사물을 실제처럼 다루면서 '이것은 사실 잠정적으로 만들어진 것, 가상의 세계다. 가설의 세계다'와 같은 의식이 동반됩니다. 그렇게 되면 확실히 세속제가 그대로 궁극의 진리라고 믿는 사람에 비해 정신의 자유가 생기고 인생에 대해 적극적으로 될 수 있겠죠. /// 그러한 삶의 방식은 브라만교나 힌두교에 대해 첨예하게 대항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왜냐하면 브라만교나 힌두교라면 빵 같은 걸 굽고 있을 때가 아니라 사실은 브라만이 되어 산속으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나 할 수 있을 리 없죠. 딱 보기에도 분명 평범하지 않은 생활로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 일은 한정된 사람밖에 할 수 없어요. 엘리트주의죠.

P303. 보살을 중시한다는 것은 '프로세스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프로세스가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결승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결승점이 없으면 프로세스도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보살이 중요하다'라고 말할 때도 '부처가 중요하다'라고 반드시 말하거든요. 하지만 지금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잘 생각해 보면,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면 결승점은 사실 제로여도 됩니다. 그리고 아까 수렴점열의 생각을 가져와 보면, 프로세스(수렴점열)가 중요하다면 결승점(극한값)은 자동적으로 완성되는 거죠. '공'이라는 것은 결승점보다 프로세스가 중요하다는 것과 거의 같은 것으로, 그래서 부처가 중요한지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게 됩니다. /// 불교의 이 논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일단 좋은 일을 하면 궁극적으로 좋은 일이 될 거라는 강한 확신이 없으면 안 되겠죠. 즉 불교는 행복의 신의론神義論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니르바나라는 곳에 도달하든 못하든 '선업'의 수렴점열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훌륭한 것이 됩니다. ///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연장하고, 자기 인생의 종점 이후에도 아직 붓다로 이어지는 프로세스가 연속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힌두교에 있던 윤회의 사고방식을 불교도 받아들여서 설명하게 됩니다.

P318. 대승의 표어로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円滿이라는 게 있습니다. '자리'라는 것은 자신의 포인트가 되는 것입니다. '이타'라는 것은 상대가 행복해지는 것이고요. '원만'이라는 것은 그것이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승은 그런 것까지 생각해서 결론을 내고, 자리와 이타는 모순되지 않는다, 양립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포인트를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는 자비라고 해야 할지, 상대를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①모순이 없다. ②어느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③어느 쪽이든 있다. ④본인도 어느 쪽인지 잘 모르겠다. ⑤어느 쪽이든 좋다. 이러한 답들이 '자리이타원만' 아닐까요? 그러니까 확정할 수 없는 거죠. 확정할 수 없고 확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서 '공'이죠.

P337. 우리는 상당히 사악한 사람이지만 제법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어서 축복받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요, 그 사람은 이번 생에서는 별로 포인트를 가산하지 않은 것같이 보여도 지금까지 윤회 속에서 축적해 온 종합 포인트는 상당히 높은 듯하니 윤회 전체로 확대한 자아로 평가하면 '뭐, 선한 사람이다'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포인트 이월제에는 구원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번 생으로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음 생이 있고, 또 그다음도 있다는 것이 지금 불행한 사람에게 구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 생의 범위 안에서는 불행한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요. 예를 들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라든가, 혹은 매우 불행한 장소나 낮은 카스트로 태어나는 경우 말입니다. 기독교라면 욥처럼 불행의 연속을 겪어도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런 태생적으로 불행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 '본인 탓이니 감수해라' 하는 식이죠.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아니죠. 그러나 '그에 기죽지 말고 열심히 하세요'라는 측면이 있으니 그 나름대로 괜찮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중략) 전생, 내생이 있는 경우에는 "네 인생은 변변치 않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전생 탓이 됩니다. 그럼에도 너는 이 인생에서 여러가지 좋은 일, 훌륭한 일을 해야 하고, 그것은 다음 생에 보답을 받는 것이다, 라는 식이 되죠. /// 예정설 같은 것과는 정반대의 작전이죠. 즉 네가 열심히 하면 최후 심판의 순간에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예정설입니다. 구원받을지 구원받지 못할지는 이미 예정되어 있으니까요. 반면 이건 네가 계속 열심히 하면 몇 번 응시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백억번 후쯤에는 어쩌면 니르바나 대학에 합격할 수도 있다는 포인트 이월제의 자업자득설입니다. /// 여기서 자아의 확대가 일어나고 있는데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내가 아니라, 적어도 시간적으로 내가 태어나기 전의 생명 세계라든지, 내가 이 세계에서 목숨을 마친 후의 나를 포함한 생명 세계를 나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거죠.

P341. 유식론唯識論을 채택했을 때 한 가지, 아무래도 '공'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실체가 남아 버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식하고 있는 주체 자체, 인식하는 마음입니다. 모든 '실재' 같은 것은 그 마음이 만든 것이며, 그 마음 안에 발생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때 그 '마음'만은 그들 '실재'의 외부에 단일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의 핵심적인 부분은 윤회를 통해서 계속되는 아뢰야식일지 모릅니다. 모든 '실체'를 마음이 만든 허망으로, '공'으로 해소하려다 보면 인식하는 주체만이 '공'으로 절대 환원되지 않는 실체로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 붓다는 처음부터 마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이 상호연관처럼 현상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현상이 마음에 환영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식이 없으면 마음은 없습니다. 아뢰야식이나 말나식은 의식이 아닙니다. 무의식도 아닙니다. 윤회 속에서 다른 생명체를 향해 삐져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야뢰아식이나 말나식은 자아의 층위의 바닥에 있는 것으로, 자아의 일부 같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자아에서 삐져나온 것입니다. 어떻게든 그것을 자아(혹은 확대된 자아)로 생각하고 싶다면 그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실체이지만 실체가 아닌 우주 같은 것이 됩니다. (중략, P345) <화엄경>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붓다의 깨달음이 출현시킨 것입니다.

>>> 다르마와 공이 충돌하는지에 대한 질문 같다.

P346. 중생의 문제점이란 자신을 부처가 아니라 진구라든가 하시즈메 다이사부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애초에 깨닫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감정과 욕망에 지배되어 단순한 인간으로서의 일생을 보내고 있는 셈이죠. 그것이 잘못입니다. 그것이 종착점의 붓다가 되었을 경우에는 자신은 진구가 아니었다, 하시즈메 다이사부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전부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사실 모처럼 모은 포인트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어 진실의 세계가 열리면 이 세계에서 워프하여 새로운 불국토의 한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 그 꿈속에 또 중생이 있고요. /// 그렇죠. /// 사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하는 거네요. /// 맞습니다.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 미몽인 셈이지만,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착각일지 모릅니다. (중략, P347) 모든 존재는 꿈이고 환영인 겁니다. 인간이 죽으면 자신이 알고 있는 존재는, 전부 존재를 확인할 수 없게 되므로, 존재는 자신의 의식의 상관자일 뿐입니다.

P349. 정의상 불국토 속엔 한 사람뿐의 붓다가 있습니다. 이것에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실천상의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깨달은 상태라는 것은 깨달아 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에,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실천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중략) 적어도 한 사람의 깨달은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깨달음의 존재 가능성에 확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깨달음에서 매력을 느낄 수도 있죠. 붓다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사람들은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실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국토에 한 사람의 붓다의 존재가 보증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P354. 이즈쓰 도시히코가 <대승기신론>을 독해하면서 강조한 것은 진여(진뢰)와 무명(미망)이 표리일체로,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거의 일체화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바로 '공'이라는 진여를 보는 마음, 대상 사이, 자타 사이의 분절이 사라져 버리는 마음의 상태가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대상을 분절화한 후 실체화하는 마음, 즉 생멸을 반복하는 허망을 실재로 보는 마음의 상태가 있습니다. 전자가 심진여, 후자가 심생멸로 불립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아뢰야식을 중심에 두는 동일한 마음의 양면이죠. 즉 심진여와 심생멸은 일심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불심과 중생심도 일체라는 것이죠. 혹은 깨달음의 상태, 즉 본각의 상태와 불각의 상태가 표리일체라 해도 좋습니다. 생각해 보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문구가 공과 색의 불가분리성을 말해 주는 셈이므로, 진여와 무명의 일체성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 중 하나인 거죠. 혹은 이 논의는 여래장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미혹 속에 빠진 중생이라 해도 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말을 따져 보면 중생심과 불심은 연결된 표리일체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중략, P357) /// 중생의 과제는 자신이 부처의 부분이며 부처와 실체로서 구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가입니다.

P366. 붓다 한 사람에 대해서 불국토가 또 하나 생긴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보살을 격려하기 위한 말장난이며, 포상을 미리 주는 공수표 같은 것으로, 불국토가 여기저기에 진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는 하나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 한 개여도 다수여도 구별은 할 수 없으니까요. 평행세계처럼 불국토가 다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비교하거나 셀 수 있는 메타 레벨의 시점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한 사람의 붓다와 다수의 붓다, 한 개의 불국토와 다수의 불국토를 구별할 수 없습니다. (중략, P367) 그리고 붓다가 무수히 많아, 저마다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상태와 궁극의 붓다가 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는 상태를 구별할 필요도 없습니다. 붓다를 서로 구별한다는 논리는 없으니까요. (P345) Σ붓다를 뜻하는 마하비로자나불은 도량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화엄경>의 사고방식 아닐까요? 

P369. 대체 왜 붓다가 근처의 아저씨로도 있냐는 거죠. "아저씨 같은 건 없어도 되잖아." 이런 말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인간의 가능성으로서 부처가 되는 길이 열려 있는데도, 그것을 잘 모르는 중생들이 있기 때문에 중생을 위해 나오는 게 아닐까요? /// 법신 쪽의 선의인 건가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선의. /// 혹은 중생이 보는 환영이랄까. (중략, P370) 붓다는 본래 그런 일을 할 필요성이 없고, 단적으로는 붓다이기 때문에 우주와 결합되어 있을 뿐입니다. 그걸로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아저씨가 되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거죠. 이것이 역시 자비가 아닐까요? 자비란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역학입니다. (중략, P372) 부처는 이 세계의 중생을 신경 쓴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단히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 대승이죠. 부처는 원래 보통 사람이었으니까요.

P377. 대승불교에 대해 고민되는 지점은 이렇게 길고 힘들고 끝없는 수행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이디어로서 세 가지 정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출발점의 결심입니다. 발심이라는 것이 역시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이게 일생뿐만 아니라 윤회를 통해 지속된다는 사고방식이죠. 어떻게 해서 지속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뢰야식' 같은 곳에 GPS같은 형태로 넣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는 불성론으로, 모든 인간은 깨달음으로 향할 가능성, 부처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있기 때문에 부처를 향해 계속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켓에 비유하자면, 1단이 충분한 추진력을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타성으로도 날아간다는 것이 발심입니다. 불성은 2단 로켓, 3단 로켓... 모든 로켓이 추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진해 간다는 거죠. '로켓인 이상, 추진력이 있다'라는 것이 불성론이라면, 세 번째는 목표인 부처가 전파를 내보내 유도하고 있어서 '얘야 이리로 오렴', '깨달음은 이쪽이야. 깨달으면 좋은 일이 있어"라고 깨달음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아미타불에게 의지해 극락에 왕생하자는 건 이런 거죠.

P379. 석존의 유언에 '스승에게는 움켜쥔 주먹이 없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승에게는 주먹에 감추고 있는 것 같은 가르침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투명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이 석존의 가르침의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P380) 힌두교에는 감성적 확신을 원하는, 실감 나게 맛보고 싶어하는 강한 욕구가 있습니다. 실감으로서 맛볼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도 있고요. 깨달음의 훌륭함을 감성적으로 선취하고 수행을 계속하는 수행법은 힌두교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합니다.

P383. "자본주의가 부활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노동자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라는 마르크스주의가 있을까요? 보통은 없지요. 하지만 실제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존재합니다. 밀교가 불교일까요, 아닐까요? 우선 수단이 어떠한가는 묻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이고, 밀교의 가르침이 수행을 촉진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일종이라는 것이지요. 겉모습이 아무리 힌두교라고 해도요. (중략, P384) '번뇌 즉 보리'라는 생각도 있습니다. 번뇌가 없으면 깨달음은 없습니다.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니 무슨 일이 있어도 깨닫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는 것은 번뇌에 가득 찬 사람 쪽이 깨닫고자 하는 동기가 강할지도요. /// 그렇다면 밀교적 일탈이라는 것은 불교 속에 있을 수 있었던 하나의 옵션이랄까요.

P385. 불교에는 도그마가 없고 깨닫는 것이 목적입니다. 도그마가 없으면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표 이외의 것은 치환 가능해집니다. 치환 가능하다면 오리지널한 원래 형태와 외견상 점점 달라져 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중략, P387) 깨달음이 목표고 수행이 거기 향하는 과정이라면 '깨달음 같은 건 실재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생각도 가능합니다. 수행하고 있는 것, 전진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중요하다고 말이죠.

P394. 불교의 특징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 특징은 대략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①불교는 개인주의적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목표를 추구하라고 합니다. 당신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②불교는 자유주의적입니다. 도그마가 없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자신의 창의성을 통해 발견하고 창조해 나가는 것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입니다. '자업자득'은 자기 책임을 말합니다. ③불교는 합리적입니다. 인과론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결과나 어떤 사건은 원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 사정으로 좌우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④불교는 이상주의적입니다. 당신 자신은 지금의 곤란한 상태에서 점점 좋은 상태로 이동해 갈 수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이러한 루트를 더듬어 가면 사회 전체도, 세계도 점점 좋은 상태로 이행해 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좋은/나쁜 벡터가 있고, 좋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수단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