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공되지 않은/수집

[수집] 영화 잘 보는 방법

날들 2024. 6. 11. 17:00

허문영 평론가 강연

제가 직장초년병 시절에 정말 존경하던 선배가 직장에 계셨습니다. 어마어마한 독서광입니다. 어떤 글도 쓰지 않으면서도 어마어마한 공부를 하고 책을 진짜 굶주린 짐승이 고기를 탐하듯이 책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좋겠습니까? 하니까 그 날 보고 싶은 거 봐라. 니가 그 날 보고 싶은 거 보는 게 제일 좋다. 똑같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박찬욱 김기덕 안 좋아하시면 안 보시면 됩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스승이 있고 자기의 멘토가 있고 자기의 정전이라는 게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은 공통의 정전 리스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자기 것이 되는 과정은 굉장히 복잡할 수 있고 다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는 박찬욱 김기덕 영화를 붙들고 1분이라도 고민하실 시간이 있으시면, 차라리 지금 너무 보고 싶은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 그게 훨씬 더 영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시다보면, 어느 순간 그 전까지는 전혀 낯설었던 것이 보일 수 있습니다. 혹시나 누가 영화를 잘 모르는데 어떻게 보면 되나요 했을 때도 똑같이 대답을 드릴 수 밖에 없는데, 영화를 그냥 많이 보면 됩니다.영화 공부? 영화 이론 책을 드는 순간 망합니다. 영화 이론 절대 공부하시면 안 됩니다. 미술 작품을 잘 보기 위해서 미술 이론 절대 공부하시면 안 됩니다. 미술관을 제일 잘 보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유럽 여행 가면 미술관 많이 다니지 않습니까? 제일 멍청한 짓이 그 넓은 미술관 다보겠다고 하루종일 뱅뱅 도는겁니다. 정말 자기 눈을 사로잡는 그림 앞에서 두세시간 앉아 있는 겁니다. 그게 최고의 감상법입니다. 그럼 그 그림은 평생 갑니다. 그런데 오르세 미술관에서 인상파 화가 그림 500점을 봤습니다. 싸그리 다 까먹습니다. 왜 그런 짓을 왜 합니까. 할 필요 없습니다. 무명의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그 그림을 앉아서 한 시간 동안 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10년 뒤에 내가 책을 뒤지다가 어느 소설가가 그 그림 보고 너무 감동 받아서 단편을 하나 썼다고 생각 해보십시오. 그런 기쁨을 누릴 기회를, 그 멍청한 미술관 관람법은 완전히 박탈해 가는 겁니다. 조우의 순간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화하고 조우를 하려면 남들이 만들어 놓은 정전 리스트를 완전히 무시하는 게 좋습니다. 단, 많이 봐야 됩니다. 무시하긴 하는데, 뭐 1년에 한 두세편 보면 무시고 뭐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홍상수 영화가 지루하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지금부터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장르 영화를 매일 한 편씩 일 년 내내 보시길 바랍니다. 딱 보고나면, 이제 지겹습니다. 지겨워서 아 나는 더 이상 못 보겠어 하는 순간에 그 영화가 등장하면, 그때 그 영화는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전혀 그전에 말을 건네지 않았던 영화들이 갑자기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거의 몸을 만집니다. 황홀해지는 순간이옵니다. 저는 그림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배움이, 이론이, 지식이 해결해주지 않는 영역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박찬욱 김기덕 잊어버리시길 바랍니다. 홍상수 영화 재밌다고 생각하면 보시고 지겨우시면 버리셔도 됩니다. 다만 누가 더 재미있을까 하는 촉각만 곤두세우시고 계속 보시면 됩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박찬욱 영화를 많이 안다고 해서 유식해지지 않습니다. 홍상수 영화를 많이 안다고 해서 유식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비평가 중에 지금 은퇴를 하신 일본의 하스미 시게히코라는 분이 있는데, 동경대 총장까지 한 인텔리입니다. 이 사람이 굉장히 잘난 체 하면서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면 줄거리는 다 까먹어. 장면 하나 밖에 기억이 안 나. 굉장히 잘난체하는거거든요. 이 사람한테는 영화에서 줄거리라는 건 기억 할 필요조차 없는 겁니다. 어떤 한 장면을 건질 수 있으면, 제가 아까 말한 북촌방향에서, 술 취한 네 명의 어슬렁거리는 몸짓과 같은, 장면 하나만 건질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영화 대단한 거 아닙니다. 영화도 영혼을 구제할 수 없습니다. 그냥 어떤 순간, 우리를 전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그순간을 기다리면서 영화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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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영 평론가 강연제가 직장초년병 시절에 정말 존경하던 선배가 직장에 계셨습니다. 어마어마한 독서광입니다. 어떤 글도 쓰지 않으면서도 어마어마한 공부를 하고 책을 진짜 굶주린 짐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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