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하스스톤

1. 뭐든 직접 해 보기 전엔 모른다
첫인상은 별로였다. 과금 게임, 운빨 게임이라는 인상이 강했고 북미 감성의 일러스트에도 거부감이 있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세계관을 전혀 몰랐기도 했다. 친구의 제안으로 일주일 정도 맛만 볼까 하며 플레이했을 때도 오래 하진 않겠네, 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하스스톤은 내 인생에서 가장 깊게 즐긴 게임이 되었다. 심한 과금이 필요할 줄 알았지만, 무과금으로 잘만 플레이했고(물론 대신 시간을 더 투자했다. 즐거워서), 운빨 게임이라 생각했지만 그 운빨 게임의 마스터즈 투어(프로선수와 프로에 가까운 아마추어 선수들이 출전하는 대회)에 두 번 출전하게 되었다.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는 다 늘 보는 얼굴들이었며, 그 잘하는 플레이어들 중에서 운이 따라주는 사람이 우승했다. 나처럼 어중간한 각오의 취미 플레이어는 높은 성적을 거두기 힘들었다. 실력으로만 되는 일도, 운으로만 되는 일도 없다.

2. 디테일이 힘이다
하스스톤은 버그가 참 많다. 스파게티 코딩이라고 꾸준히 욕도 먹는다. 그런데도 롱런하는 이유는 디테일에 있다. 막 선술집에 도착한 것 같은 왁자지껄한 목소리들과 여관주인의 환영인사, 게임이 시작될 때 로딩화면에서 '숨쉬기 운동의 달인', ' 잘나가는 연예인', '블리자드 개발진' 등 독특한 상대들을 지나쳐서 매칭되는 '적절한 상대'. 모든 카드에 각각 부여된 유머 넘치는 플레이버 텍스트와 맛있는 음성 더빙, 상대 초상화를 부수는 찰진 타격감까지. 막상 카드 밸런싱과 메타에 대해서 유저들은 항상 불만이 많지만 잘 짜여진 디테일이 만들어낸 하스스톤만의 '감성'이 바로 오랜 시간 유저들이 남아있는 이유 중 하나다. 그리고 하스스톤의 가볍고 편안한 감성은 캐주얼한 게임성과 완전히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개발진의 철학이 분명했다는 증거다.
3. 아는 만큼 보인다
하스스톤은 규칙을 익히기 쉽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낼 수 있는 카드를 막 내기만 해도 게임이 유리하게 진행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라이트하게 즐기는 유저들 중 '내가 대충대충 해서 그렇지 내 실력은 수준급인데 나한테만 운이 안좋네 이겜 망겜임' 같이 생각하는 유저들이 많다. 하지만 이는 십중팔구 착각으로, 본인이 뭘 모르는지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발언이다. 운을 내게로 끌어오는 것이 곧 실력이다. 개별적인 게임 하나하나를 따지면 내가 전혀 대처할 수 없는 운에 좌우된 게임도 있겠지만, 확률적으로 가장 내게 유리한 시나리오를 판단하여 운을 내게로 끌어오는 '실력'이 있다면 게임을 여러번 반복했을 때 당연히 승리 확률이 높아지고 때로는 상성까지도 뒤집을 수도 있다.
4. 과대대표된 인터넷 여론을 주의하자
게임 커뮤니티의 여론을 살펴보다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이 많아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내 실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의견차이도 있었겠지만, 내 실력이 최상위권이 되니 헛소리들이 참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인터넷 여론은 잘못된 의견을 과대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상위권의 게임 메타와 하위권 메타가 달라서 유저들의 게임 환경에 실제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때가 많고, 따라서 각자의 경험에 근거하는 의견들이 서로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밸런스 VS 재미, 무엇이 중요한지?'라든가 '어그로 VS 컨트롤 VS 콤보, 어떤 덱이 더 어려운지?' 같은 논쟁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분야를 잘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하스스톤은 유저들이 게임에 대해 '충분히 경험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캐주얼한 게임이다. 또, 인터넷에는 이름표가 없다. 상위권 유저든 하위권 유저든, 다 익명에 불과하니 그냥 화력 세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그래서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격화되면 서로 랭크를 인증하라고 싸우게 되는데, 애초에 인터넷에선 열 안 올리는게 가장 지혜롭다.
4.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하스스톤에는 '템포'라는 개념이 있다. '주도권'에 대입해서 이해하면 된다. 아무리 내 덱에 강력한 카드가 많더라도 그 카드들이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하는 수동적인 카드 혹은 사용하기 위해 준비하는 턴이 필요한 카드들이라면 상대적으로 능동적이고 단순한 카드를 가진 상대방이 '템포'를 잡게 된다. 상대가 갈수록 강해지는 내 카드를 이기기 위해서는 '템포'를 놓치면 안 된다. 예를 들어 A라는 카드의 모든 효과를 활용할 수 없는 이른 타이밍이라고 가정해 보자. 사람은 손해를 보기 싫어하기 때문에 모든 효과를 활용할 수 있는 B라는 다른 카드를 선택하고 싶어지는게 당연하지만, 정말 그 순간의 최대 '템포'를 위해서 A의 나머지 효과만을 사용하는것이 더 낫다면, A를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손해처럼 느껴지는 선택이더라도 승리를 위해서라면 실행에 옮길 줄 아는, 그런 결단력이 필요하다.
두 번의 마스터즈 투어가 끝나고, 나는 하스스톤에 더 이상 즐길 게 남아있지 않다고 느꼈다. 그래서 하스스톤의 초기 개발진이 만들어낸 <마블 스냅>이라는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